매일신문

실학-"중국외 나라와 무역" 자주적 개국 주창

초정 박제가(1750~)는 암울한 18세기에 시대를 앞선 중상주의적 통상론과혁신적 구빈론을 주창한 고독한 천재였다.역사에 가정이란 있을수 없지만 '북학의'에서 초정이 주장했던 정책들이그대로 실시되었다면 한반도에 개화의 순풍이 불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왕조시대, 정책수립자인 전제군주 정조에게 헌책된 '북학의'에서 초정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기대했으나 위정자들은 '시기상조' 혹은 '신중을 기해야한다'면서 이를 회피, 탁견은 좌절되었고, 조선후기의 중병도 치유책을 찾지못했다.

서세동점하는 세계 조류에 눈돌리지않던 양반 관료들과는 달리 '청나라의선진문물을 배우자' '농업 못지않게 상업도 중요하다' '기술의 발달로 나라를 지키고 가난을 내쫓자'던 박제가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정도로 시대를 넘어선 안목을 지녔다.

1750년 승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자란 그는 소년시절부터 서도와 시문으로 재주를 떨쳤고, 20대에는 현실불만과 우국충정에 사로잡혀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진보적 엘리트였다.서얼이라는 숙명적인 불행으로 말미암아 뜻하는 바를 마음껏 추구하지못했던 그는 정계에서 무명초와 같았지만 저항하면서 모색한 혁신의 소리는 낙후해버린 조국의 침체된 역사에 하나의 가능성과 전환의 계기를 던져주었다.18세부터 평생의 지기가 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등과 부패된 현실을 걱정하고 이에 대항하여 새로운 물결로 조국을 혁신해보려던 이들 젊은 네 준재들의 시집 '한객건연집'은 연경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특히 초정은 시에 능하고 화필에도 장하여 서양화의 화법을 곁들인 '의암관수도' '목우도'(사진)등 걸작을 남기고 있으며 대서에 능숙하여 연경에서 고가로 팔렸다고 한다.'백성들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뒤떨어졌던 생활혁신을 위해 경제 재건에 뜻을 품었던 박제가는 뛰어난 재능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됐고, 29세(정조 2년)에는 정사 채제공의 연행을 수행, 3개월동안청나라에 머물렀다. 한창 번영의꽃을 피우던 청나라에서 새로운 문물을 듬뿍 받아들이고 귀국한 그는 침체한 조국에 '북학의' 내외편을 내놓았다.'북학의'는 20년 후인 정조 22년 그가 경기도 영평현령으로 있을때 농서를구하는 임금의 요청에 의하여 응지정소의 형식으로 왕에게 바쳐졌다. 이것이'진소본북학의'인데 처음에 저술한 '북학의'의 3분의 1 정도로 첨삭하고 순서를 바꾸어 올린 것이다.

'북학의' 내편에는 주로 수레 배 성 벽 궁실 도로 교량 소 말등 생활에 관계되는 기구 시설등이, 외편에는전제 농잠총론 과거론 관론 재정론등 정책과 제도에 관해 서술돼있다.

여기서 '북학'은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을 배우자', 또는 '중국에 유학하자'는데 그치지않고 보다 넓은 의미로 서양을 배우자, 서양에 유학하자는 의미까지 암시, 뒷날 개화운동에 대한 선구적 형태로 제기되었다.대부분의 실학자들마저 중농을 위해서 상업을 억제해야한다는 의견, 즉상업과 농업의 관계를 말업과 대본으로 보고 화폐유통의 억제를 주장하며 소비억제, 사치금지론 일색이던 당시에 그는 적극적인 상업장려와 그 바탕이되는 생산진흥을 강조하였다.

놀고 먹는 유식양반을 나라에 기여하기는 커녕 좀먹는 존재로 파악한 그는양반도 상업에 종사시키자는 유수원 홍대용등 전대 실학자들의 뒤를 이어 '양반상인론'을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란 우물과 같은 것이니 이를 줄곧 이용하지않으면 말라버린다' '쓸줄을 모르면 만들 줄을 모르고, 만들줄을 모르면 민생이 날로 곤궁해진다'중앙대 김용덕교수는 '한국의 실학사상'에서 박제가의 상업론을 근대경제학을 방불케하는 독특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즉 생산된 것이 소비되어야재생산이 가능하니 덮어놓고 소비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생산진흥에 치중하여야 한다는 그의 이론은 '소비가 미덕'이라는 산업사회의 경제론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전라도민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하여 외국과 통상할 것을 주장했던토정 이지함, 토정을 열렬히 지지했던 반계 유형원의 통상론을 '참으로 따를수 없는 탁견'이라고 이례적으로 북학의에서 두번(내편 선조, 외편 통강남절강상박의)이나 인용, 격찬했던 초정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서 청국과의 해로통상을 주장하고 국력을 길러 다시 해외 여러나라와 통상할 것을 역설했다.이는 철저히 폐쇄됐던쇄국시대에 개국을 부르짖은 것으로서 1876년 강화도조약보다 무려 98년이나 앞서서 '자주적 개국'을 주장한 셈이다."지금 나라의 큰 병폐는 가난인데 무엇으로 구할 것인가. 중국과 통상하는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나라와 나라사이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역하는것이 대세의 흐름"이라고 지적한 그는 일본 유구 안남 서안등 여러나라가 모두 절강 교주 광주등지에서 교역을 하고 있으니 우리도 수로를 통하여 여러외국과 교역할 것을 상소하였다.

경북대 김영호교수는 박제가가 원산의 해산물 가격과 서울의 가격을 비교,차이를 줄일 수있는 방법을 문제삼으면서 전국의 '물가문귀천'을 평준화시켜야겠다는 일물일가의 법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밝힌다."지금 중국하고만 통상하고 다른 나라와 통상하지 않는 것은 일시적 술책이지 정론은 아니라고 한 초정은 해외 여러 나라와도 통상해야한다는 일종의단계적인 무역론을 제시했다"는 김영호교수는 박제가가 이때 벌써 종속적인무역구조를 예리하게 경계하였다고 주장했다.

즉 외국의 소비재가 들어오고,국내에서 생산량이 한정돼있는 금 은이 나가는 무역구조를 개선해야한다고 갈파하였다는 것이다.

나라가 작고 백성이 가난하여 국내의 상공업으로는 오히려 부족한 조선은반드시 해외와 통상하여야만 경제를 풍부히 할 수 있다며 서양과의 통상을주장하고, 해외통상이 반드시 문화교류를 가져와서 우물안 개구리 식의 고루한 폐습을 깨뜨릴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초정의 흥상론은 당시 발전하려는 국내 상업자본의 요구와 이미 동방에 파급하고 있는 서양 자본주의의 대세에 대한 대응책인 셈이다.이러한 초정사상의 현대적 의의는 독특한 국방론에도 잘 나타나있다.'군비라는 것은 민중의 일상생활과 직결되어야만 준비되고 비용이 안 드는것이다'라고 북학의 병론에서 밝힌 초정은 군비, 기술, 생산력은 삼각고리를이룬다고 하였다. 즉 평소 수레를 사용하면 비상시 물자 보급의 편리함이 자동적으로 해결되고, 벽돌을 쓰면견고한 성벽이 마련돼 직접적인 군비 투입없이도 삶속에서 국방을 튼튼히하는 기초가 마련되다는 것이다.〈최미화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