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킹비더 감독의 '전쟁과 평화'

나폴레옹이 정복한 19세기초의 유럽은 프랑스를 제외하고 여전히 봉건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따라서 유럽의 농민과 시민은 그를 봉건적 멍에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하는 영웅으로 숭배했다. 독일을 침략한 그에 대해 괴테도 고개를 숙이고 베토벤은 교향곡을 바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침략전쟁을 위해 걸핏하면 징병을 하여 민중들로부터 멀어졌다. 피히테가 '독일 국민에게고함'을 쓴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침략은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영화화한 '전쟁과 평화'도 나폴레옹의 러시아침략을 배경으로 한다. 그 주인공인 삐엘과 안드레이도 처음에는 나폴레옹의 진보사상을 숭상했으나 그들이 전장에서 본 것은 침략자로서의 잔혹한 나폴레옹이었기에 그와 싸우고 암살까지 기도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5백59명의 등장인물중에는 나폴레옹,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쿠투조프장군 등의 실제인물도 있으나대부분은 허구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귀족과 민중으로 나누어진다. 톨스토이는 반귀족, 친민중의입장을 명백하게 보여주기에 소설은 분명 민중소설이나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반드시 그렇지못하고 도리어 귀족사회의 러브로맨스와 전쟁스펙터클에 그치고 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략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보르지노전투에서 그는 이겼으나러시아민중의 끝없는 저항에 의해 끝내는 패배했다. 보르지노전투에서 야전사령관 쿠투소프 휘하의 군대와 함께 농민들이 빨치산으로 투쟁했다. 그결과 60만명이 넘는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중에서 3만명 정도만이 살아남았고 나폴레옹은 몰락했다.

훗날 나폴레옹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무서웠던 전투가 보르지노의 그것이었다고 술회했다. 모스크바 서남쪽 약1백㎞지점에 있는 보르지노 전장은 지금은 평화로운 농촌이나 전쟁기념관이 남아있다. 그곳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모든 미술관, 박물관에서 그 전쟁에 관한 그림과 유물을 볼 수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침략 1세기전 쯤에 피터대제에 의해 근대화를 시작하여 에카테리나 2세를 거치며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서구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농업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전쟁과평화'에서도 보듯이 농민의 나라였다. 농노제를 기반으로 하는 농민착취의 나라였다. 우리는 그전의 러시아사에서 황제와 귀족에 저항한 푸가초프의 반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비롯한 모든 작품에서 농민을 찬양하고 그들을 억누르는 귀족지배계급을 비판했다.

러시아에서 '조국전쟁'으로 불리는 1812년 보르지노전쟁은 러시아민중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어 푸슈킨을 비롯한 국민문학을 낳았고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국민음악을 창조했다. 푸슈킨의 '대위의 딸'은 푸가초프반란을 소재로 삼았고 차이코프스키의 장엄한 '1812년'은 조국전쟁의 대포소리로 끝난다. 19세기 러시아에서는 제까브리스뜨의 봉기를 비롯하여 농민반란과 사회운동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것은 마침내 20세기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비디오로 볼 수 있는 '전쟁과 평화'가운데 1956년 미국에서 만든 오드리 헵번, 헨리 폰다주연의 것은 러브로맨스에 그친다. 소설 속의 나타샤는 위선과 인위를 거부하는 생명력긍정의 상징이나 영화 속의 오드리 헵번은 그런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요정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반면 1967년 러시아에서 만든 약 7시간의 대작을 축약한 비디오는 소련 국책영화답게 몹시지루하나 보르지노 전투의 묘사는 사실에 매우 가깝고 대체로 원작에 충실하다는 평을 들었으며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기도 했다.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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