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행 고참 차장인 박영호씨(48·가명)는 요즘 통 신문을 읽지 않는다. 바빠서가 아니라 신문을펼쳐들기가 겁나서다. '금융기관 구조조정' '정리해고제 우선도입' '임원진 대폭 물갈이'…. 도무지희망적인 얘기를 들어볼 수 없다.
근무 중에도 가족 생각만 하면 등줄기가 서늘해 온다. 대학 다니는 두 아들 취직 때문에 가뜩이나마음이 무거운 터. 아들들은 아버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근히 도움을 바라는 눈치다. 그때마다 "너 하나 취직 못시키겠느냐"며 큰소리 치지만 마음은 무겁다.
은행생활 20여년. 천직(天職)이라 생각하며 한번도 한눈 판 적이 없다. 고참 차장으로 지점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요즘 그는 갈피를 못잡는다. '올라 갈수록 정리해고 순위에 가까워지고,그렇다고 평생 꿈꿔온 지점장을 포기할 수도 없고…' 한때 잘나가던 그는 동기들보다 항상 2~3년앞서 승진했다. 그게 지금은 오히려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외국어 하나 똑바로 못배워둔 것이 한스럽고 컴맹이라 불리는 자신이 못견디게 밉다.
하지만 구조조정이니 정리해고니 할 때마다 박차장은 은근히 부화가 치민다. '권력의 시녀 마냥하라는 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따라왔는데…' IMF라는 괴물에 밀려 말 한마디 못하고 평생직장을떠나야 할 판. 답답한 마음에 노동조합에 열성인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두고 보는 수밖에요"가 대답의 전부.
요즘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복도에 나와 먼 산을 바라보며 줄담배를 피우는 일이 잦아졌다. 살생부(殺生簿)나 다름없는 명예퇴직 신청서가 나돌고 있다. 나이 50을 바라보지만 20대 못잖게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용기있게 뛰쳐나가도 뾰족한 수는 없지만 쫓겨 나듯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더욱 싫다.
"이제 겨우 내 인생 절반 남짓 살았구나 하며 한숨 돌리는데 나더러 낙오자가 되라는 겁니다. 돈이 없어 눈물로 하소연하던 중소기업 사장들 얼굴도 떠오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위에서 뭐라그러든 도와주는건데…. 그때 재벌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지 않고 유망한 중소기업을 도와줬더라면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번 한번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굳이 IMF가 아니더라도 앞으론 언제라도해고조치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 한번만 자신을 비켜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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