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나의 Y2K

2000년 1월 2일 오후 1시 10분.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나는 낡은 노트북 앞에 앉는다. 두렵다. 혹시라도 그 동안 저장해 놓은 파일이 일순간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전원을 켜는 손을 잠시 멈추게 한다. 플러그를 꽂고 본체에 잭을 연결하고 전원 보턴을 누른다. 꾸우욱. 여느때 보다 오래 누르고 있던 검지 손가락을 뗀다. 익숙한 화면이 뜨고 이내 바탕화면에 아이콘이 하나 둘 자리를 잡는다. 무사하다. '한글 97'에 커서를 고정시키고 마우스를 꼭꼭 누른다. 시그널 음이 들리고 화면이 뜬다. 무사하다. 불러오기가 가운데 자리를 잡고 최근 문서 목록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안동 100년 슬라이드 시나리오 원고','안동문화 7집 기획안', 그 몇 칸 아래 '나의 시' 등등 다들 무사하다.

빈 문서에 들어가서 글쓰는 날짜를 쳐넣는다. 위의 첫머리에 '2000'을 쓸 때 사실 '199'라고 치다가 아차, 하고 다시 고쳐 쓴다. 컴퓨터는 멀쩡한데 정작 내가 연도 인식 오류를 범한다. 이런 경험은 해가 바뀔 때마다 겪게 되는 일이지만 올해만큼은 낯설다. 이제까지는 연도를 쓰다가 틀리면 고작 한 글자, 많아야 두 글자정도 고치면 그만인데 올해는 무려 네 글자나 된다. 2000년이라니. 어쩌다 내가 한 천년에서 다른 천년에 걸쳐 사는 사람이 되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지만 말이다. 어느새 나는 처음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예의 그 익숙한 버릇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나의 Y2K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끝났다. 듣자하니 원자력발전소나 은행이나 공공기관 할 것 없이 무사하다는 소식이다. 인류의 대재앙으로까지 예견되던 이 사건은 멍에를 쓴 소도 웃을 일로 막을 내렸다. 어쨌거나 이 일은 타자기를 두드리는 수준에서 조금 벗어난 386 따라지인 나에게는 큰 두려움이었다. 여기저기서 괜찮다 괜찮다 소리를 듣고도 두려움에 떨며 노트북을 켠 오늘 나의 모습 또한 소가 웃을 일로 내 머리 속에 저장한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만든 이 매일신문 칼럼방에서 빠져 나온다. 다시 들어갈 때까지 무사하길.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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