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모진 시대 이겨낸 지조의 삶 선비정신 12인의 육성

일제식민지배와 해방정국, 한국전쟁 및 이승만독재, 4.19혁명, 유신독재와 5.6공 군사정권을 거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학계에서도 수많은 학자들이 변절했다. 현실과 타협함을 넘어 정권에 협력하고 나아가 독재 이데올로기 창출에 모종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을 징용으로, 위안부로 내몬 최남선이 그랬고 박정희 정권에 협력한 이선근이 그랬으며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이병도는 그 뚜렷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일, 식민사관 시비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변절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협박과 고문을 이기면서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이도 있었다. 비록 그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단재 신채호가 그랬고 피로 물든 한국독립운동사를 쓴 위암 박은식이 그랬다.

역사비평사가 발간하는 계간 학술지인 '역사비평'은 지난 90년 겨울호를 시작으로 모진 시대환경에도 올곧은 선비정신을 지킨 우리시대 대표적인 학자들을 골라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직접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이 증언대에 선 인물은 12명. '학문의 길 인생의 길'(역사비평사 펴냄)은 바로 이들이 그동안 증언한 육성을 한데 묶어 최근에 나온 단행본이다.

비록 역사를 중심으로 인문학 분야로 한정돼 있긴 하지만 여기에 등장한 학자들은 모두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학자들 중에서도 학문적 업적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특히 변절하지 않은 삶을 산 참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직에서는 대부분 은퇴한 60대 이상인 이들이 암울한 식민지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서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이 몸으로 부대꼈다는 점에서 이들의 증언이 곧 한국현대사이기도 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는 한국사 전공자로 현재 민족문화추진회장인 벽사 이우성(75) 박사와 한문학과 금석학의 대가로 4.19 교수단 메모를 주도한 고 임창순(1914~1999) 성균관대 교수, 강만길(67) 고려대 명예교수, 조동걸(68) 국민대 명예교수가 들어있다.

서양사 분야에선 프랑스혁명사 연구에 새 장을 연 민석홍(75) 서울대 명예교수와 서양사상사연구의 차하순(71) 서강대 명예교수가 포함됐고 경제사 전공자로는 한국경제학의 대부인 최호진(86) 전 연세대 교수와 한국적 경제학의 주창자인 주종환(71)전 동국대 교수가 증언했다.

또 언론에서는 리영희(71) 전 한양대교수와 언론자유화의 상징적 인물인 송건호(73) 전 한겨레신문사장, 비판적 언론학의 창시자로 통하는 이상희(71) 서울대 명예교수가 들었고 여성학에선 이효재(76) 전 이화여대 교수가 포함됐다.

이 증언집에는 이들의 생애와 인생관, 학문경향, 실천적 행동은 물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한국현대사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때문에 이 증언집은 하나의 한국현대 지성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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