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독일에서는 장작 대신 돈으로 불을 때기도 했다. 당시에 독일 사람들이 얼마만큼 잘 살아서 돈으로 불을 지폈나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사실은 너무나 못살아서 일어났던 일이다. 장작이 돈보다 몇 백 배나 비쌌던 것이다. 고인이 된 유치환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이란 시에도 "낙엽은 마구 흩어러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구절이 있다. 망명정부의 돈 가치가 낙엽보다 더 나은 바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일화들 중에는 "수레로 돈을 싣고 장을 보러 가는데 잠시 화장실 갔다오는 동안 돈은 그대로 있는데 수레는 온데 간데 없더라"는 우스개도 있다. 1차세계대전 전·후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은 극심한 물가고를 겪었는데 독일의 경우 1919년 1월에서 1923년 말까지 5년동안 물가는 4천800배가 아닌 4천800억 배나 올랐다.
1980년대 아르헨티나 칠레 등 남미국가들은 연간 3천~5천%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물가가 한창 오를 때면 흥정하는 사이 가격이 두 배나 올라가니 한 달에 한 번의 월급이 아니라 하루에 두 번씩 급료를 지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와같은 초인플레이션은 모두 극심한 재정적자에 의해 발생되었다.
물가가 이렇게 뛴다면 일반 서민들은 경제생활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앞날을 위해 무슨 계획이니 투자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중에 가장 바보스러운 일이고, 가장 현명한 일은 돈이 생기는 대로 빨리 써버리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위의 이야기들의 조짐은 전혀 없지만 앞으로의 물가 문제가 만만하지 않다.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경제는 극심한 침체를 겪게 되었으며 실업도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IMF, 세계개발은행,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로부터 58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 받는 최우선 조건 하나가 환율안정이었다. 환율이란 달러가치에 대한 한국 돈의 가치이니, 한국은행에서 돈이 시중으로 풀리면 한국 돈의 가치가 떨어져 환율이 안정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환율안정을 위한 초긴축적 인 통화정책은 꺼져가는 불씨의 산소 공급마저 막는 일이었다. 이와같은 위기에 당면하여 재정적자가 확대된 것은 돈을 어떻게 집행하였는가에 대한 효율성 논란은 있겠지만 어느 정도 불가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작금에 여·야 사이에 108조원이니 188조원 혹은 400조원이니 하며 설왕설래하는 재정적자충돌이다.
지난 98년 말쯤에는 경제가 조금 붉은 빛을 띄게 되고, 11월에는 "IMF는 끝났다"는 정부 및 IMF의 비공식 선언이 있은 후, 99년 들어서는 정부는 IMF의 눈치를 보지않고 기록적으로 돈을 풀어 경제의 불을 확 피웠다. 외환위기 전 96년의 통화증가율이 15%인 것을 감안하면 99년 통화증가율 28%는 거의 두 배 수준인 셈이다.물가를 발생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재정적자와 통화증발이다. 외환위기라는 중병을 치료하느라 재정적자-통화증발 등 독한 약을 처방하다보니 위와 간이 많이 상하게 되었다. 그동안 경제가 워낙 침체되어 물가상승은 수면 밑으로 잠복하고 있는 중이지만, 재정적자-통화증발 뒤에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있다. 최근에 국제원자재 및 원유 값이 급등하고, 다시 임금투쟁이 확산조짐을 보이는가 하면, 사람들의 씀씀이가 흥청거리자, 물가상승압력이 수면위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도 레이건대통령 시절 8년간 연 1천억~1천500억 달러 수준의 재정적자로 무역적자가 겹쳐 경제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살았다.
물가는 일단 발생하면 다른 처방이 없다. 뒷북 치느라 뒤늦게 재정과 통화를 죄면 경제만 죽일 따름이다. 발생하면 그대로 참고 지내야 한다. 물가상승을 막는 가장 좋은 정책은 미리 발생 원인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참고 지내기는 어렵지마는 재정지출을 억제하고 통화를 관리하여야 한다. 이 처방은 몹시 쓰지만 물가로 홍역을 치르는 것보다는 낫다.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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