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공한 향투출신 재일동포들-25)아티스트 김성구씨

프로데뷔 40년만에 첫 음악 CD를 낸 재일동포 콘트라베이스 연주가 김성구(金成龜·62)씨는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진주시를 감돌아 흐르는 남강(南江)의 추억을 살려 타이틀 곡명을 '남강의 바람'이라고 달았다.

그밖에 이번 독집 CD에는 총 7곡이 수록됐는데 나머지 6곡은 '나의 꿈 경주', 어머니, 가야(伽倻), 산하, 천리(千里), 남강의 바람(남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가 고국을 그리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 음악 CD는 지난해 2월 녹음을 완료하고 곳 발매되기 시작, 재일동포 사회와 한국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들 사이에 조용히 확산되고 있다.

양친은 고향이 그리우면 언제나 임란때 왜장의 허리를 안고 함께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한 논개의 얘기를 자주 들려줬다.

해방전 일본으로 건너온 부친 김범수(金範秀)씨는 탄광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어 모친 이순이(李順伊)씨도 뒤따라 건너와 막노동과 행상으로 가계를 꾸려나갔다.오사카에서 재일동포들이 집중적으로 몰려사는 이쿠노 지역에서 자란 김씨는 운명적으로 어릴때부터 집에 있던 축음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그는 음악성을 타고나 환상적인 음률에 끌려들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는 그의 요구를 모친은 어려운 살림속에도 들어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콘트라베이스를 배웠고 졸업후 도쿄로 진출, 재즈에 매료됐다. 22세때 오사카(大阪)에서 재즈 오케스트라 단체의 일원으로 입단, 프로의 길로 뛰어들었다.

재일동포들은 일반적으로 사업 등 모든 사회활동에서 차별을 당하지 않기위해 한국 국적은 유지하면서도 이름만은 한국식으로 하지 않고 일본식이름을 사용한다.유명한 재일동포 인기가수인 박영일(朴英一)씨도 자신의 한국식 이름외에 아라이 에이치(新井英一)라는 통명을 사용하며 가수활동을 한다. 그만큼 그 세계에도 텃세가 심하고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김씨도 일본에서의 음악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일본식이름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그는 10년전 어느날 오사카 시내에서 공연을 하면서 '오늘부터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김성구라는 본래의 나의 이름만을 사용한다'라며 '본명선언'을 하고 일본식 이름을 과감히 벗어 버렸다.

"자신의 가슴속에서 민족의식이 끝없이 밀려올라와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흐리며 많은 청중들에게 당당하게 외쳤지요. 나는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 김성구라고요"

그당시 일순간 객석은 고요해 졌다가 한두명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격려의 환성과 함께 일제히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이날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이 있었고 그때도 확실하게 태도를 밝혀 문화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후 한국적인 독특한 선율을 사용한 곡들을 직접 연주하고 작곡도하는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이러한 그의 보기드문 활동에 동조하고 한국적인 토속 음악을 좋아하는 재일동포 후배들이 CD 제작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그가 만든 곡과 연주를 남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줘야한다는 것이었다.

CD제작을 위한 녹음 연주에는 유명한 재일동포 아티스트들이 스스로 동참하겠다며 찾아왔고 한국에서 KBS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연주가 이정식씨를 초청, 민족의 화음을 만들었다.

지난해 7월 오사카홀에서 CD발매 기념 콘서트를 열었을 때는 재일동포를 포함한 500여명의 청중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오사카 교육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던 그는 한때 조총련에 가입했던 시기도 있었음을 고백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취직도 어려워 생계를 위해 잠시 신세를 졌으나 곧 결별했다고 한다.

김씨는 최근들어 자신의 한창시절 전공을 살려 음악을 통한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콘트라베이스는 악기중 깊은 저음을 낼 수 있어 인간 내면에 주는 영향이 강하다며 연주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음악활동을 해왔으나 흥행면에서는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지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

넉넉하지 못한 생활속에 현재 그는 만성신부전증에 걸려 정기적으로 인공투석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자신이 그리워하고 작곡도 했던 고향인 진주 남강을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는 어릴적부터 부모에게 남강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으며 자랐고 상상속의 고향산하를 그려왔었다. 그의 양친은 젊은 시절 남강변을 거닐던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 떠오를 것 같은 그러한 상상력으로 그는 '남강의 바람', '나의 꿈 경주', '가야' 등의 선율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앞으로 진주시를 방문해 남강변에서 자신의 곡들을 연주하는 것이 꿈이다. 선조들의 산소도 찾아보려 한다. 한국의 토속적인 음악의 영감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뿌리찾는 여행을 꼭 성취하고 싶어한다.

-朴淳國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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