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남짓 사진 찍기에 매달렸다. 그것도 집요하리만큼 경주 남산 불상만을 갖고. 남산 관광 전속 사진사냐고? 결례의 말씀.
소설가다. 소설 쓰러 경주왔다가 남산 불상에 매료돼 남산 아래에 사글세로 홀로 방 한칸을 얻어 사진찍기에 몰두한 지 어언 2년여가 지났다.
남자다. 혼자 산다니 총각이냐고?
54세. 서울내기 연극배우에게 늦장가들어 고3부터 초등 6년생까지 참한 딸을 셋 둔 현풍 출신이다.
김대식씨. 그는 양파속처럼 모를 사람이었다. 스무고개 하듯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캐내어도 깊은 속이 종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가 소설 주인공마냥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별스럽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이면서도 동기들 다 하는 외무고시를 하지 않았다. 결혼해서 다 사는 아파트에 한번도 살지 않고 촌집을 택했단다.
직장생활도 단락의 연속이다. 졸업후 73년 동아일보 사업국, 기획국 등에서 5년 일하다 한 5년 쉰다. 그러면서 사진 찍는 맛을 들였다. 또 82년 들어 다시 취직해 5년 다니다 또 3년 가량쉬고 다시 대우재단 학술사업 전문위원으로 들어가 5년 쯤 근무하다 95년 49세의 나이에 연봉 4천여만원의 직장도 미련없이 훌훌 손을 턴다. 대학 재학 당시 학보 신춘문예에 응모, 가작을 받으면서 갈고 닦은 솜씨로 소설 한번 '폼나게' 써 볼 작정으로, 그 나이에.
이런 그의 속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아는데는 취재를 마친 후 그에게로부터 얻은 자신의 92년 작품 '여자와 사진'이란 소설을 읽은 뒤다. 그는 훨씬 뒤인 96년에 펴낸 '몽유금강'을 자신의 사실상 데뷔작이라고 밝힌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자기 나름의 겸양이리라. '여자와 사진'의 탄생도 기이하다. 처 이름으로 출판사를 만들고 이 책과 또다른 소설 한권을 직접 워드로 쳐 편집까지 해 출력시켜 제본만 다른 곳에 맡겼을 뿐이다. 든 돈은 자신의 연말 보너스 300만원이 전부. 출판사는 바로 임무끝, 폐업 신고했다.
제목에서 보듯 그가 청·장년기를 거치면서 빠져 들기 시작한 글쓰기와 사진이란 두가지 소재를 교직한 자전적 소설이다. 때문에 그의 삶 조각 조각이 묻어난다. 6·3세대이기도 한 그는 소설에서 막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 '욱'을 내세워 사랑을 교감중인 사진반 후배 여학생 '현애'와의 80년 광주사태를 보는 시각 등에서 현실을 회피하려 한다며 공박당하다 결별에 이른다. 욱은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끌려가 고문에 못이겨 친구 이름을 대주고, 그 죄책감으로 한 때 시골에 들어가 현실을 등지기도 했었다. 또 여러 등장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다양한 외국 사진작가를 등장시켜 사진 보는 법 등을 현학적으로 들려준다. 그는 취재중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운동권 동료를 숨겨주다 소위 기관(소설에선 '노란 방')에 끌려간 적이 있다"고 편린처럼 얘기했었다.
여하튼 그는 남산 불상 사진 찍기에 최근 2년 세월을 꼬박 묻었다. 별난 그답게. 왜일까.
"대우재단에서 그만둔 뒤 글을 쓰려니까 주위에 술친구·선후배들이 많아 안되겠습디다. 그런데 우연히 경주에 와 선배에게 글쓰기 좋은 조용한 곳 없냐고 넋두리했더니 소개해 준 곳이 외동읍 북토 마석산(남산으로 연결된 산) 밑 한 집이었지요. 거기서 산책 삼아 신라문화원에서 만든 남산 안내도 하나 들고 남산을 오르내렸어요"
98년 1월쯤 일단 남산 밑에 자리를 튼 것이 화근이 됐다. 글쓰기는 뒷전으로 한채 사진기 들고 불상 찍는 일에 본격 나서게 됐으니까.
"저는 불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남산에 올라 보니 불상을 비롯한 보물 덩어리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더군요. 미술이건 조각이건 어떤 형태로든 이런 것들을 다양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나만이라도 사진쪽에서 부처님 상호(相好)쪽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습니다"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그는 그 때부터 인위적인 빛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자연광을 통한 남산 불상 사진 찍기를 위해 적당한 빛을 찾아 여름, 겨울없이 땀 흘리고 추위에 떨어야 했다.
부처골 '감실부처'를 찍을 땐 겨울에 햇볕이 낮게 뜰때여야 해 삭풍부는 동지(冬至)를 전후한 시점을 택했고, 사면이 부처로 새겨진 탑골 '부처바위'의 북면을 찍기 위해선 여름철 해가 높이 솟는 아침 9시쯤에라야 가능했다.
카메라도 10년도 더 된 구닥다리 올림퍼스 OM1, OM2. 그 장소에 모인 프로 사진작가들 중엔 "저런 카메라로…"란 비웃음을 입에 물기도 했다.
그렇게 한 컷 한 컷을 애지중지 사진에 담았던 그는 마침내 사진전을 갖기로 했다. 80년부터 집에다 암실을 갖추고 사진찍기에 본격적으로 몰입했던 그는 직장생활을 할 때 자투리 시간을 이용, 서울 창신동 판자촌을 찍어 생애 최초의 사진전을 치른 적이 있다.
그 전시회도 별났다. 마을 동네 뒷산, 솔밭사이에다 빨랫줄을 걸어 집게로 30여장의 사진을 매단 정말 조촐한 전시회였다.
그는 지난 해 말 경주 신라문화원을 불쑥 찾아 들어가 전시회 개최 바람을 전했고 문화원의 흔쾌한 승낙으로 문화원 전시관을 빌려 자신의 두번째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크기도 A-4용지 크기의 8×10 사이즈로 균일, 여전히 단촐한 전시회였다. 이어 올 초 부산, 2월 대구 예술마당 '솔', 부산 등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가져 남산과 불상을 전국에 자랑했다.
"남산의 불상들은 석굴암 본존 법식마냥 목에 주름이 세개 있어야 하고 머리는 꼬불꼬불해야 한다는 등의 법식을 따르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당시 경주 민초들의 모습을 부처로 형상화한 것이 대다수지요. 우리나라의 민불(民佛)군락지인 셈입니다"
사진 평론가이기도 한 그가 2년여를 몸던지면서 느낀 남산 불상기 총괄론이다.
하나의 일이 끝나가고 있는 지금, 그는 다시 자신의 본업인 소설가로 돌아가려 한다.
"사진 쪽으론 모든 게 참 쉽게 진행되는데 이상하게도 소설은 어려워요"
그에게 소설은 아직도 벅찬 일로 남아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허투루 써 낼 수 없는 탓이리라.
그는 삼국유사를 소재로 작품을 구상중에 있다. 경주에 와 남산을 쫓아다닌 덕에 떠 올린 영감이다.
소설가, 사진가, 사진평론가. 그 중에서 아직도 '대성'하지 못한 소설 쪽을 향한 그의 노력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글·裵洪珞기자 사진·李埰根기자
---취재후기
"당신은 당신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살잖아"
김대식씨가 그의 아내로부터 자주 듣는 푸념이다.
유부남이면서도 자유인이기를 추구한 탓일 것이다. 그는 그러나 "다만 부지런하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신문사 직원, 소설가, 사진작가, 사진평론가, 학술재단 전문위원…. 그처럼 많은 직업을 갖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그에겐 촌각을 아끼는 삶과 검소가 함께 했다. 그가 처음 가진 80년대 판잣집 사진전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매 주말·일마다 쫓아다니며 만들어 낸 작품들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펴 낸 3권의 소설도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 다른 사람들이 출근할 때까지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신혼초 13평 연립주택에서 살다 땅과 자연이 그리워 85년 경기도 일산 텃밭이 있는 촌집 700여평을 얻어 이사해 지금껏 살고 있다.
87년 일산이 신도시로 고시되면서 그 부근에 있던 자기 땅도 20배 가량 오르는 뜻밖의 '횡재'를 얻기도 했지만 이것이 직장 생활이 끊고 이어지는 삶속에서도 풍부하진 않지만 자기가 하고픈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작은 동기가 될 수도 있었다고 우리로선 지레짐작할 밖에.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데 저는 두려움이 별로 없어요. 젊은 날 막노동도 했고 시골에서 농사품도 팔아 봤거든요"
그런 그이기에 남산의 부처가, 그 소박한 얼굴의 불상이 소설쓰기에도 바쁜 그를 강력히 흡인시켰으리라.
그의 아내는 더 이상 그를 타박하지 않는다. 소설 주인공처럼 그를 담담하게 바라봐 준다. 다만 컴퓨터 통신에 애로를 느끼는 딸들이 일산 신시가지에로라도 이사가자는 보챔은 외면하기 어렵다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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