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시형칼럼-또 청문회를 연다는데

또 청문회냐? 국민들은 냉소적인 반응이다. 몇 차례 청문회라는 생소한 이름의 정치 쇼를 지켜봤지만 결과는 실망뿐이었다. 진실을 밝히는 청문회 고유의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실은커녕 온통 거짓말 대회장으로 전락했다. 변명 투성이다. 그것도 청문회랍시고 일단은 치렀으니 면죄부를 씌워준 공헌밖엔 아무것도 한게 없다. 그리고 국민들에겐 분노, 허탈, 정치 불신의 벽만 쌓아놓았다.

그런 청문회를 또 연다고 한다. 뻔한 답변이 나올텐데, 그걸 하느라 또 국력 낭비를 하겠다니, 해봐야 뻔하다. 왜냐하면 청문회가 우리정서엔 맞지 않기 때문이다.첫재, 뭐라고 묻든 "모른다"연발이다. 기억이 안난다. 그런 말 한적 없다. 잘못 전달되었다. 본의가 아니다. 오해다. 과장되었다. 그때는 국민의 뜻이…. 이렇게 잡아떼고 우기면 그럭저럭 넘어간다. 위증죄로 고발한다는 등 으름장을 놓지만, 말뿐이지 한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국민의 눈엔 참으로 뻔뻔스럽고 가증스럽다. 하지만 당사자나 묻는 국회의원이나 으레 그런거려니 하는 건지 그냥 어물쩡 넘어간다.

물론 이런 어거지가 안 통할때도 있다. 명백한 증거가 드러나서 모른다고 잡아 뗄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 다음이 충성심 작전이다. "윗분은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건 나의 단독결정이라고 혼자 책임을 덮어쓴다. 국민은 갸우뚱이다. 윗분이 모를리 없을텐데, 그만한 재량권이 주어질리도 없을 텐데. 하지만 정작 따져 물어야 할 의원들도 거기서 끝이다. 오히려 그런 충성파를 칭찬 격려한다. "의리의 사나이"라고 존경한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국민들도 그 충성파의 의리 앞에 결정적으로 마음이 약해진다. 의리 있는 사람으로 추앙한다. 얼마 전에는 윗분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쓴 나머지 옥살이를 몇차례나 치른 사람이 있었다. 그때마다 국민들은 그를 의리있는 남자로 크게 받들었다. 더욱 불가사의한 점은 여자들 사이에 더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그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시정에 나돌았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런 한국적 풍토에서 청문회라니. 될리가 없다. 윗분이 모른다니? 정황으로 따져 이건 분명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의리라는 명분 앞에 거짓말은 묻혀버린다.

어디 청문회 만이냐, 우린 언제부터인가 거짓말에 대한 불감증 환자가 되어 버렸다. 언론매체조차 이젠 거짓말이라는 표현마저 잘 쓰지 않는다. 대신 말바꾸기니, 식언이니 하는 요사스런 말들을 만들어 냈다. 하긴 워낙 지체 높으신 분들의 거짓 말씀이라 직설적인 표현을 쓰기가 민망스러울 수도 있겠지, 나라 체면도 있고, 아이들 듣기도 그렇고. 그래서일까, 추상같아야 할 언론의 칼날도 거짓말 앞에 아주 무뎌졌다. 워낙 많아서 일일이 따져볼 엄두가 안나는 건지, 아니면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는 건지, 대단찮은 일로, 필요악쯤으로 치부하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예우를 갖추려고 그러는 건지, 상식있는 사람으로선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알면서도 모른다는 거짓말 한마디로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게 한 나라도 우린 알고 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 언론의 추궁은 집요하고 추상같았다. 쫓겨난 대통령은 이사를 갈래도 그곳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포기했다. 이렇듯 거짓말쟁이에 대한 응징은 철저하다. 추호의 융통성이나 관용은 없다. 세계 최강 미국이 절로 된게 아니다.

우린 언론에 다시 한번 호소한다. 딴 소리 하지마라, 긴소리 할 것도 없다. 식언도, 말 바꾸기도 아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쟁이는 철저히 추궁하고 응징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거짓말쟁이가 지도자네 합시고 국민 앞에 나서는 일이 없어야 겠다. 밝고 믿을 수 있는 사회건설을 위해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

나라가 썩고 있는 병소가 거짓말일진대 어찌 이걸 가벼이 넘기려 하는가.

성균관대 의대교수.신경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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