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이 마침내 사교육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갖기 시작했다. 사설 학원들이 각급 학교 기출문제를 출제 교사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데 대해 '저작권'을 내세워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역학구도를 뒤집는다는 측면에서 중대 사건으로 평가된다.
우리 교육사를 거슬러 보면 공교육은 사교육에 항상 수세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 속에서는 사교육이 더욱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학교 교육은 갈수록 황폐화되고 결국 '교실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교사들의 저작권 소송도 이같은 맥락에서 보면 벼랑 끝에 몰린 공교육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기는 학교, 나는 학원
사설 학원의 강의는 항상 학교 진도를 조금씩 앞질러 간다. 좋게 보면 예습의 의미지만 학원에서 미리 배운 학생들이 학교 수업에 흥미를 가질 리 없다.
평가, 즉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며칠 전에 학생들에게 이른바 '시험 노하우'를 집중적으로 제공한다. 여기에 이용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학교에서 지난 수년 동안 출제돼온 문제집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유인물로 배포됐으나 요즘에는 아예 학원 표시를 한 책자로 묶어 제공한다. 중학생 대상 ㅇ학원 1학기 중간고사 기출문제집.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 12개 과목에 걸쳐 인근 6개 학교에서 그동안 치러진 중간고사 문제가 시험지 모양 그대로 실려 있다. 담당 교사와 부장, 교장의 결재도장까지 선명히 찍힌 문제지도 있다.
체인학원으로 대구 전역 학생들을 받고 있는 ㅈ학원 기출문제집에는 대구 거의 모든 중학교의 시험 문제가 모여 있다. 문제마다 출제 학교, 유사 출제 학교가 표시돼 있고 공통예상문제도 제시된다.
모중학교 앞에 있는 학원은 기출문제뿐만 아니라 교사의 출제유형, 선호분야 등까지 분석해 학생들에게 일러준다. 이쯤 되면 학생들 사이에 '족집게 학원'으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학교 교육에 대한 신뢰 추락으로 연결된다.
◇불거진 저작권 문제
기출문제를 제외하고 시험문제를 내면 될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 5월 중간고사를 치를 때까지 수업 기간은 2개월여. 교육 목표와 중요 내용이 뻔히 보이는 좁은 범위에서 그것도 교과서를 중심으로 출제할 경우 예년 문제의 패턴을 벗어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국어나 사회 등 인문과학 분야의 교과는 그래도 좀 나은 편. 지난해 제일여중에 근무한 국어과 임종헌 교사의 경우 신간 서적이나 신문 기사, 만평까지 활용해 문제를 출제했다. 수성구 지역 몇몇 중학교 국어과 교사들은 모임을 만들어 계속 연구하고 논의하다가 출제 때가 되면 새로운 유형이나 내용을 담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그러나 수학이나 과학 등 자연과학 분야 교과는 주어진 범위의 교육 목표가 워낙 분명하기 때문에 5년 정도의 기출문제만 모으면 80%이상 적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학교의 평가 기능이 사설학원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받는데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누구도 '교사 저작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작권에 대해 묻자 상당수 교사들은 "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는 아닌 것 같은데…"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공.사교육 기능 바로잡아야
사교육이 공교육의 수업과 평가기능을 빼앗아 버리자 학교 교사들은 사교육이 해야 할 보충.심화 부문에서 새로운 평가방법을 만들어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 고교 국어과 교사는 "교과서의 원리와 개념, 이를 확대시켜주는 각종 자료들이 담아 수업에 활용하고 있다"며 "사교육에서 해야 할 공교육 보완과 지원기능을 공교육에서 떠안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사실 교사들이 저작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보상 따위의 '경제적 이익'을 바란 게 아니라 학교교육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일종의 자구행위라고 볼 수 있다. 교사들은 학원에 나돌고 있는 기출문제집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대신 교육청이 이 역할을 대신해 달라고 요구한다. 각급 학교에서 치러진 시험문제를 문제은행이나 평가 관련 데이터뱅크로 구축, 교사들끼리 고민과 노력을 공유하고 그 결과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金在璥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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