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골 가파른 능선을 오를때만 해도 동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부족했던지 일자봉 정상에서의 동해는 안개로 뿌옇게 덮여있었다. 수십번을 올라 한번 볼까말까한 동해.
선녀골을 지나 등산길을 오를때 희미하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공군 레이더 기지. 차오르는 숨을 걸러가며 내딛은 일월산 정상 일자봉은 그렇게 험상궂고 볼품없었다. 허탈했다.
정수리를 통째로 깎아 철주를 박아 놓은 듯 흉칙하다. 밉다.
일자봉에서 황씨부인당까지의 길은 그 흉물때문에 황량하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힌다. 해(日)와 달(月)이 나란히 솟아 정겨운 모습을 인간들이 자기 편하자고 송두리째 찢어버린 형국이었다.
황씨부인당 주차장에는 벌써 차들로 가득했다. 영험을 얻기위해 전국 각지에서 대형버스와 승합차를 타고 온 것이다. 줄잡아 10여대 남짓하다.
일월산 월자봉 남서릉의 '황씨부인당(黃氏婦人堂)'.
10여명의 무속인들이 제(祭) 준비에 바쁘다. 이들은 속계를 벗어나 황씨부인을 만나는 일이 운명인 듯한 모습들이었다.
"몇해 전 알수 없는 병을 얻어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차도가 없었지요. 그러던중 대구 남산보살과 함께 이곳 황씨부인당을 찾아 신내림을 받고 완쾌됐지요"
장마 더위가 막 기승을 부리던 참인 어저께. 황씨부인당에서 만난 햇무당 김남희(38·경남 밀양군)씨는 황씨부인의 영험을 이렇게 들려 주었다.
몇해전 8월 한여름밤을 꼬박 세우며 내림굿은 진행됐다. 인간이 신을 만나고 속계와 신계를 넘나들기를 몇번이나 거듭하는 큰 굿이었다.
김씨는 황씨부인과 선녀, 동자 등 수많은 신을 만나고 그들의 가르침을 얻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오랜 병으로 소진해진 몸도 날개 깃을 단듯 가벼웠다.
그렇게 10여시간의 진통 끝에 김씨는 햇무당이 됐다. 그후 황씨부인의 예지력과 신통력을 얻어 인간의 맺힌 한을 풀어주고 있다.
수개월 병든 몸이 어떻게 여름밤을 꼬박 샐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황씨부인의 영험과 기운이었다. 바로 이들이 믿고 있는 신기력(神氣力)인 셈이다.
기도가 시작됐다. 한 무속인의 황씨부인과 산신을 부르는 목탁소리가 산을 울린다.
욕심과 나락, 번뇌와 회한. 모든 속계의 악구덩이가 몸과 마음을 빠져나간다. 이들 틈에선 연신 "살려 주세요"라는 소리가 새 나온다.
황씨부인의 신딸이라는 김태순(41·경남 양산시 신기동)씨는 "무속인들은 신을 통해 예지력과 신통력을 얻는다"면서 "세상 혼탁 속에서 가끔 기운이 흐려지면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답답해져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 "살려 주세요"라 외는 이유를 설명했다.
신기(神氣)를 잃는 것은 이들 신딸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실기(失氣)후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며 세상을 등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섬뜩하면서도 절절한 기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씨는 "황씨부인당과 일월산은 우리 무속인들에게 다시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기운을 준다"고 덧붙였다.
허물어져가는 건물 처마에 걸린 부인당을 알리는 간판이 적잖은 세월을 말해준다. 오색무지개를 비스듬히 잡고 앉아 있는 여인네 초상화. 아무리 살펴도 신같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여염집 아낙같은 모습이다.
황씨부인당 지킴이 김태원(73), 천분조(71)씨 부부는 황씨부인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황씨부인은 결혼 첫날밤 어린 신랑의 오해로 소박맞고 수년간 일월산을 헤매다 잘못을 알고 찾아온 신랑에게 당을 지어 원혼을 달래달라 부탁하고 죽었다.
수백년 세월이 흘려 1900년대 중반경 부산에 살던 박보살(일명 부산보살)이 무병에 걸려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중 한 여인이 현몽해 자신은 일월산 황씨부인으로 사당을 지어 섬기라는 말을 들은 후 일월산 자락에서 족두리를 쓴 석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당을 지으니 병이 낫고 용한 무당이 됐다.
부산보살은 황씨부인신을 강신받은 정통성을 주민들에게 인정받아 실질적인 일월산 영험자로 살다가 지금의 천보살을 신딸로 받아들이고 몇해전 죽었다.
황씨부인당을 두고 전해져 오는 짤막한 내력이다. 조선사회를 살았던 한많은 여인이 가장 여성적인 일월산과 맺은 운명이 담겨있는 듯 했다.
자신이 살다간 고통과 한의 삶. 조선여인네들의 한많은 인생을 황씨부인이 대신 달래준 것일까.
황씨부인도 여인이었다. 영정옆에 쌓인 코티분과 화장품 등이 이채로웠다. 좌측에 겹겹이 걸린 형형색색의 한복도 전형적인 여성공간임을 말해준다.
이 모두가 무속인들이 기도 도중 황씨부인이 원하는 것을 사다 놓은 것이란다. 수백년이 흐르면서 일월산의 주신으로 자리잡은 황씨부인은 아직도 고운 한복과 분 화장한 자신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수백년 흐른 세월도 풀어내지 못한 여인의 한이 있기나 한듯 저녁 나절에는 끝내 안개를 밀어내고 굵은 빗방울이 초여름 일월산을 덮었다.
---32년 지킴이 김태원씨 부부
황씨부인당 지킴이 김태원·천분조씨 부부
김태원(73)·천분조(71)씨 부부가 황씨부인당 지킴이가 된 것은 3대조를 거슬러 올라간다. 안동감찰사였던 증조부를 거쳐 조부, 그리고 부친대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이에 김씨의 조부는 일월산을 찾아 치성을 들였고 그 영험으로 김씨는 12명의 자식을 둘 수 있었다는 것.
이같은 내력으로 그는 32년전 일월산 천화사에 불탑을 지어 바칠때 시중들던 부인 천분조씨가 무병을 앓기 시작해 황씨부인당으로 들어와 그때부터 살기 시작했다.그 후론 천보살이 부인당을 떠나기만 하면 몸이 아파 이내 돌아와야 했다는 것. 이들 부부는 신을 받았지만 굿을 주재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인당과 산령각을 보살피며 기도객들을 맞는 기킴이 역할을 한다.
김씨는 "그간 일월산과 황씨부인의 영험으로 병을 나아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며 "심지어 포항사는 남자는 간암을 앓다가 이곳에서 백일기도 후에 완쾌했다"고 말한다.
천보살이 말을 잇는다. "누구나 신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정신착란증과 당뇨병 같은 것이 잘 낫는다. 특히 무병을 앓는 사람들이 굿을 한뒤 무당이 된 수는 부지기수"라 한다.
봉화군 재산면에서 농토를 물려받아 농사를 크게 짓고 있는 김씨부부의 아들 김종학(47)씨가 살고 있다. 그도 처음에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몇해전 정신착란증으로 고생하던 초등학교 동창생이 부인당에서 3년간 치료후에 고쳐진 것을 보고 부인당의 영험을 믿게 됐다.
이들 부부는 "황씨부인신의 영험이 세상에 알려져 일월산 전체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면서 "죽는 날까지 부인당을 지키며 살아갈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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