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돌아올 수 있겠지…" 우선 급한대로 약간의 식량과 홑이불·솥·멍석 따위로 피란짐을 꾸렸다. 족보책까지 챙긴 여문 사람도 있었지만 김준필 아주머니는 어린것들 갈무리에도 정신이 없었다.
인민군 12사단이 안강을 위협하던 8월말. 경주쪽으로 이어진 안강사람들의 피란행렬. 이따금씩 쌕쌕이가 거친 폭음을 내뱉으며 머리위를 스쳐갔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자지러졌다. 멀리 기계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자꾸만 가슴이 쿵덕거렸다.아주머니네는 우선 형산강변에 피란짐을 풀고 며칠을 보냈다. 포플러 나무 가지를 꺾어 홑이불로 천막을 친채 멍석을 깔고 앉아 밤을 지샜다. 국군이 안강에서 철수하자 피란민들은 경주로 몰려갔다.
미군과 국군은 그들을 천북면 화산리로 소개시켰다. 게릴라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비극의 발단은 여기서 비롯됐다. 화산리로 향하던 피란민 행렬과 낙산교를 도하한 일부 인민군 병력이 한때 뒤섞여버린 것.
더러는 화산을 거쳐 보문·양남 쪽으로 멀리까지 피란을 갔지만, 아주머니네는 화산초등학교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함께 국군이 시키는대로 인근 탄광골로 들어갔다. 골짜기는 피란온 사람들로 꽉차있었다.
큰집 작은집 식구들이 개울가에 모여 앉아 아침을 먹고 세살배기 아들에게 젖을 물리는 손간,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전투기의 폭음이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설마했다. 옆에 인민군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그러나 공중에서 불벼락이 쏟아졌다.젖먹이와 여덟살난 아들이 그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시삼촌 내외도 포연 속에 유명을 달리했고, 얼굴에 파편을 맞은 동서는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졌다. 아주머니는 왼쪽 팔이 갈가리 찢긴채 혼절하고 말았다.
그후 해마다 돌아오는 6월이 아주머니에게는 차라리 형벌이었다. 먼산 뻐꾸기가 피울음을 토했다. 무논 엉머구리는 밤새 통곡을 했다. 그해 여름. 그리고 50년 세월.
기자는 팔순을 넘긴 김준필 할머니와 함께 비극의 현장을 찾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다시는 떠올리기 조차 싫었던 탄광골에 선 할머니. 반세기만이었다. "화산학교가 어디냐"고 사방을 살피던 할머니는 넋을 잃었다. "그 어린것들…흙이라도 한줌 덮어 줬더라면…"
생때같은 자식을 둘씩이나 앗아간 골짜기. 한 집안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계곡. 먼산을 쳐다보던 할머니는 같은 말만 자꾸 되뇐다. "왜 군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라고 했는지…식구들이 왜 한곳에 몰려 있었던지…"
당시 탄광골에는 수백명의 피란민들이 몰려 있었고, 더구나 대가족이 한데 어울려 피란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집안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명에 갔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일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다.어른들을 따라 양남에서 피란을 하고 돌아왔다는 이중길 안강읍장(59)은 "당시 '화산갔던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몇해전만 해도 '화산제사'라 해서 한날에 제사가 드는 집이 많았다"고 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는 "전투가 끝나고 학교에 나가보니 6학급이던 학생 수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며 당시의 피해상황을 전했다.
피란민들의 수난과 더불어 기계·안강이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국군은 무릉산~곤제봉~호명리 낙산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형성한채 경주 사수에 생사를 걸었다. 전사(戰史)는 그래서 이때의 방어전을 '경주북방 전투'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한국전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 생겼다. '독단활용'. 상급부대의 명령을 무시한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될 일이었다. 수도사단이 안강을 포기하고 형산강 남쪽으로 철수한 9월 4일 새벽. 호명리에 남아있던 수도사단 1연대장 한신 중령(대장 예편)은 남쪽 2km 후방인 호서리로 철수하라는 1군단장(김백일 준장)의 명령을 거부했다. 전술적으로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방어선이라는 확고한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호명리 낙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한채 형산강 도하를 시도하는 인민군 2개 대대의 병력을 격퇴했다.
결국 1연대가 인민군의 전격적인 경주 입성을 저지하고, 무릉산~곤제봉~형산강을 연결하는 1군단의 새 방어선 구축에 시간적인 여유를 제공한 것. 9일 오전 11시 1연대 전술지휘소를 찾은 군단장은 연대장의 노고를 치하했다.
호명리 낙산에서 1연대가 포위될 위험을 무릅쓴 방어작전을 감행하는 동안, 곤제봉에 배치된 17연대는 9월 6일부터 15회에 걸친 장군멍군격의 고지쟁탈전을 벌이며 경주방어를 위한 사투를 벌였다.
수도사단 1연대 학도병이었던 김영재(69·경주시 용강동)씨는 "전투가 치열했던 고지에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우묵한 호마다 인민군의 시체가 꽉 들어차 있었다"며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의 시신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고 회고했다.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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