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다. 3일분의 비상식량과 탄약을 지급받고 함정에 오른 학도병들은 흥분과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이젠 정말 전쟁터에 나가는구나…' 어둠이 짙어가는 망망대해. 뱃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거세지면서 불안감도 높아갔다.
772명의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병력을 실은 2천700톤급 LST(상륙선) 문산호가 부산을 출항,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 다다른 것은 1950년 9월 14일 새벽. 대대장(이명흠 대위)은 그때서야 '장사 해안에 적전상륙, 인민군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라'는 비밀 작전명령을 대원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상륙작전이 개시되기도 전에 동해안을 강타한 태풍 '케지아'호에 밀려 배가 좌초하고 말았다. 비운의 LST 문산호와 함께 유격대의 운명도 진퇴양난에 처했다. 해안에는 4~5m의 높은 파도가 배와 모래사장을 삼킬 듯이 휘몰아치고, 갑판위에는 총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대대장은 '상륙'을 독촉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배문을 열자마자 거센 파도가 들이닥치며 5, 6명의 대원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해송에 밧줄을 연결하기 위해 6명의 특공조가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역시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생사의 갈림길이 이토록 허망할 수가…' 최영옥 대원(대구공고 3년 지원입대)은 고향의 부모님과 부산으로 마지막 면회를 왔던 누나를 떠올렸다. 물때를 잘 아는 선원들의 사투끝에 간신히 4개의 밧줄이 연결됐다.
밧줄에 목숨을 건 필사의 상륙. 파도에 휩쓸리고, 해안에서 날아온 인민군 총탄에 쓰러진 대원들이 부지기수였다. 장사리 해안은 돌연 총성과 포연으로 얼룩지며 모래밭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오후 3시경. 상륙작전 개시 10시간 만에야 유격대원들은 장사리 주요거점인 200고지를 탈취했다. 그날밤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판초우의를 덮어쓴 채 호속에 쪼그리고 앉은 강정관 대원(대구 계성중 3년 지원입대)은 부모님 몰래 전선에 뛰어든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칠흙같은 밤을 뜬눈으로 지샜다. 허기진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았지만, 바닷물에 젖은 건빵과 미숫가루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무전기 고장으로 통신도 끊겨버렸다. 대원들은 인민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거듭하며 중환자들을 좌초된 배위로 옮겼다. 당초 예정된 3일간의 작전이 일주일을 넘기고 있었다.
19일 새벽에야 또다른 LST(조치원호) 한척이 좌초한 문산호 북쪽 400m 해안에 도착했다. 밧줄과 구명정을 이용한 철수작전이 한낮이 되도록 계속됐다. 밧줄을 놓친 대원들이 다시 바닷속에 잠기고 총탄에 맞아 떨어졌다.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집중되자 함장은 갑자기 밧줄을 끊어버렸다. 모래밭에 남은 대원 30~40명의 피맺힌 절규를 뒤로 한 채 조치원호는 해안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살아 떠나는 자와 적진에 남은 자. 모두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잠시후 새까맣게 몰려든 인민군들이 배를 타지못한 전우들을 포위하는 모습이 아득히 보였다.20일 아침 부산항에 도착한 대원들은 그때서야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접했다. 자신들을 사지에 내던진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현재 군부대(장사소초)가 위치한 상륙작전 현장 전몰용사위령탑에는 이 작전으로 139명의 학도병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당했으며 수십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새겨져 있다. 이같은 집계에 대해 노병들은 실제 전사자만도 200명이 넘는다는 주장을 펴고있다.
최재명 장사 상륙참전 유격동지회장(75·부산시 수영구 광안2동)은 "전투경험이 전혀없는 18, 19세의 젊은 학생들로 구성된 유격부대를 상륙작전에 투입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인민군 후방교란과 보급로 차단 등의 적잖은 전과를 거뒀지만, 희생이 너무도 컸다"고 지적했다.
유격동지회의 배수용(77) 사무국장은 "무모한 작전으로 수백명의 학생들이 희생양이 되었는데도 장사상륙작전은 전사(戰史)에서조차 외면을 당해왔다"며 "살아남은 전우들이 뜻을 모아 현장에 위령탑을 세우고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는 형편"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장사십리(長沙十里), 바다는 그때처럼 말이 없는데 격전지를 찾은 노병들은 '모래톱에 묻힌 어린 충혼'이 서럽기만 하다.
장사상륙작전의 비극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은 9월 중순을 넘기면서 국군의 공세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형산강을 경계로 공방전을 거듭하던 3사단도 17일 총반격 명령과 함께 개전이래 최초의 적전 도하공격을 감행했다.
공세 이틀째, F-51 전폭기 4대가 출격해 네이팜탄을 쏟아붓고 영일만에 떠있던 미군함의 16인치 함포 사격이 집중되면서 강건너 인민군 진지는 일순 불바다로 변했다. 인민군의 화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3개 중대 병력이 형산강을 건넜다.
19일 새벽에는 피아가 뒤섞인 혼전이 벌어졌다. 수백에 달하는 남북의 젊은 주검이 붉게 물든 모래밭 위를 뒤덮었다. 인민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기관총 사수의 시체는 하반신이 탄피 속에 푹빠져 있었다.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인민군이 친동생인 것을 발견한 한 국군병사는 얄궂은 전쟁과 시대의 불운을 한탄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때 장병들은 피로 물든 형산강을 '혈산강'이라 불렀다.
북진. 낙동강 전선이 공세로 전환되면서 전장은 북녘땅으로 옮겨지고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또다른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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