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월산(11)-일제의 광산 수탈

1945년 8월 15일은 일월산에도 벅찬 감격이 흘러 넘쳤을 것이리라. 온 산을 헤집어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지긋지긋한 일제(日帝) 수탈의 곡괭이질이 멈춘 때문인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이용하며 구사한 광물수탈 전략은 통감부시대에 접어든 이듬해인 1906년 7월 광업법 및 사금채취법 발표에서 시작된다.

일제는 1915년 조선광업법을 제정, 한반도 전체 무연탄·흑연·아연·몰리브덴광 등을 일본 재벌들이 독점토록 했다. 금·은광도 대분인 일인들이 차지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20년 한국내 광산중 일본인 소유는 80%가 넘었던 반면 한국인은 고작 0.3%에 불과 했다.

아예 통째 삼켜 버린 것이다. 일월산은 이런 불행한 수탈사의 궤적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생채기를 입어 영산의 정기와 자원을 적잖게 잃어버렸다.

영양군 일월산면사무소 화단 한켠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엄청 큰 물레방아 돌절구가 놓여있다. 어른 가슴팍 만한 높이에 둘레가 4m나 된다. 일월면 용화리 호박골에 고려시대때 창건했다는(지금 소실됨) 용화사에서 절밥 곡식을 찧으려 만든 것이라 한다.

일월산 광산을 운영하러 왔던 일인들이 그런 희귀한 물건을 가만둘리 없었다. 본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자신들이 만든 일월산광산 용화제련소 앞마당에 옮겨다 두고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반출직전 해방을 맞아 이 돌절구는 일월산의 또하나의 얘깃거리를 전해주는 소품으로 남게됐다. 일인들은 닥치는대로, 정말 별것을 다 가져가려 했다. 면의 상징물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지난 92년 면사무소로 옮겨와 잘 관리하고 있다. 일인들이 돌절구를 가져다 놓았던 일월면 용화리 아랫대티 초입의 일원광산 용화제련소는 일제가 영양·봉화 일대 일월산 수탈에 나서 파헤집은 30여개 광산의 광물 대부분을 제련하던 곳이다.

규모만도 가로 30m, 세로 80m에 이른다. 위쪽으로부터 대·중·소 쇄석기가 설치되고 돌과 광물을 분류하는 마광기, 광물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부선기, 용광로 등이 13단계(층)로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납과 아연을 취급했다. 대규모 경사형 콘크리트 선광시설 꼭대기에는 채광된 광석들을 이용하는데 사용했던 높이 2m의 수평굴과 수직굴이 있고 제련시설안은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폐광물이 쌓여 있다.

제련시설 위쪽과 좌·우측에도 광미 등 폐기물이 폭 15m, 높이 10m 이상으로 쌓여 금세라도 쏟아져 인근 민가를 덮칠 기세다. 제련소 앞 수만평의 광미(鑛微)야적장에는 깊이 5m 이상으로 폐기물이 쌓여 비만 오면 배어 나오는 시뻘건 폐수가 낙동강 상류 장군천(반변천의 본류)으로 흘러 들어 하류 1㎞ 지점까지 바위와 자갈돌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일제 수탈에 이리저리 채이고 헤집힌 민족의 산과 민초들의 피멍같다.

일제의 일월산 광물 수탈은 대동아 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일본인 나카가와 다로오(中川太郞·당시 63세)가 일월산 일대에 구리광맥을 발견, 채굴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그해 가을 간이제련시설이 갖춰질 무렵 일월산 일대 30여개 광산업무를 관장하는 일월광산 채광사무소가 설치되고 본국에서 파견된 시마모리 히로시(島森 浩·당시 60세)가 소장으로 취임해 광물생산의 고삐를 조였다.

당시 일월광산 채광사무소는 제련소와 분석계, 공자계, 채광계, 변전소, 경비계 등으로 편제돼 일본인 기술자와 사무직 50여명이 상주 했다고 한다.

해방직전 안동 예안면에서 이곳에와 3년 동안 광산사무실 급사로 일했다는 이홍영(72·일월면 문암리) 옹은 『선녀탕 계곡 맞은편에 채광사무실이 있었고 최씨로 기억되는 한국인 노무주임 1명 이외는 모두가 일본인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제련소와 사무실이 건축된 이듬해 1939년 여름부터 일월산 주변 광산의 구리·아연 채굴이 본격화된다. 주요 갱은 선녀탕 입구와 장군골, 병풍골을 따라 집중돼 있다. 선녀탕 입구 본 갱은 길이가 무려 500m에 이르고 이를 축으로 거미줄 같은 소갱구와 100m 아래로 난 수직갱이 연결된다.

1940년초에는 제련소 부선시설이 완공되고 영월화력발전소로부터 전기가 공급되면서 하루동안 채굴되는 광석만해도 140t, 해방때까지 총량은 무려 100만t에 이르렀다. 하루70t을 처리할 수 있는 부선시설이 쉴새없이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대구지방환경관리청이 지난 98년 조사해 발표한 일월광산 오염실태 보고서 자료에서는 당시 용화 제련소에서 정광된 광물만도 금과 은 각 1t, 구리 800t, 납 1천400t, 아연 1천800t 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채굴이 한창이던 40년대 초반 이일대 장군골과 큰거리 등에는 250여호의 산막들이 들어서 인근 안동과 봉화, 영주 등지에서 징용된 400여명의 광부들이 기거했다. 장군골 입구에는 당시 이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던 초소였던 일본식 건물이 아직 남아 있다.

민초들은 새벽부터 해가 떨어질때까지 일월산 골골 갱구와 제련시설로 흩어져 채굴과 광물수송 등짐질로 초죽음이 됐다.

이옹은 "그당시 한인 광부들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맨몸으로 갱굴에 들어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거나 바위에 깔려 목숨을 잃는 사고가 빈번했으나 변변한 보상과 장례조차 없었고 노임이라야 보리쌀과 감자 몇개가 고작이었다"며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 산막광산과 소천면 서천리 장군광산도 일제가 개발한 광산들이다. 1930년대와 1941년 일본 중첩광업(주)에서 광산회사를 설립해 망간을 주로 생산했고 이를 수송하기 위해 영주~봉화간 사철(私鐵)을 놓아 춘양면까지 연결하려 했다.

일월산은 아니지만 일월산과 지근거리에 있는 지리적 연관성 때문에 일월산 광물 수탈사를 언급 할때 빠질 수 없는 곳이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牛口峙里) 금정광업소다. 골짜기의 생김새가 마치 소의 입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나 금정(金井)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

1920년 김태연이라는 강원도 정선 사람이 금맥을 찾아 3년뒤 일인에게 금광권을 넘겨 본격 개발이 시작된 곳으로 당시 금광에서 물이 많이 나와 금을 캐는 것이 마치 우물에서 금을 기르는 것과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김수진 할아버지는 "일제가 무랭이골에서 캐낸 광석을 제련장이 있는 금정까지 나르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 금정터널을 뚫고 총독부의 지원을 업고 금의 대량생산을 위해 쇠절구로 원광을 빻아 물로 금을 선별하던 시절에 자동선별기까지 갖추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곳에는 상주인구가 1만 5천여명이 될 정도였다. 소학교는 물론 활동사진을 볼 수 있는 극장과 미나미 지로 총독이 묵었다는 호텔이 있었다. "총독이 이 광산을 독려차 방문한다 해서 소학교 재학 시절 환영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김옹.

이곳에는 아직도 산림간수가 숙소로 사용했던 일본식 목조건물을 비롯 풀포기조차 자라지 않는 황량한 야적장과 폐광미 덩이가 덩그러니 남아 일월산과 주변 산하를 대동아전쟁 군수물자확보 기지로 삼아 철저하게 유린한 일제의 간교한 수탈사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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