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공부가 끝나가던 학창시절의 마지막 학기를 맞으면서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라 부르던 법정스님의 당호(當號)를 듣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에서 따온 맛이 얼마나 좋던지 산에 사시는 모습과 함께 한동안 내 속에서는 도각도각 냇물에 씻기며 부딪는 자갈돌처럼 여운이 남았었다. 이제 곧 세상에 나아가 내가 쓸 방호라도 얻기를 소망하였다. 우연히 제주도 유배지에서 썼다던 추사(秋史)선생님의 '소창다명(小窓多明) 사아구좌(使我久坐)'란 글귀를 듣고 부터 그만 마음이 작 달라붙었다.
들판에는 휘 뼈들이 바람에 씻기고 움집에는 찾는 이 없을지언정 작은 봉창 너머로 한낏 밀려드는 햇볕은 수인(囚人)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유배살이가 절절히 배어나는 이 문장(文章)에서 되려 희랍의 철인(哲人)디오게네스의 햇살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세상을 다 가진 정복자도 방해할 수 없었던 행복이 거기에 있었다. 익숙한 어떤 전율을 느끼며 이 이름 하나로 재미있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우거(寓居)의 제호(題號)를 '소창다명실(小窓多明室)'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잊어버릴 지 십년이 넘어서 이러저러한 끝에 여기 와서야 겨우 그 말뜻을 한풀 깨닫게 된다. 사진이라는 새로운 시각언어를 배우면서 이제껏 들어왔던 그런 세계를 점점 선명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지만, 사진(寫眞)을 존재의 신비를 검증하는 작업과 같다고 느꼈다. 나는 카메라 뷰파인더의 이 작은 창틀 속에서 추사 선생과 디오게네스의 세계를 본다. 이제 방의 제호가 알맞게 잘 붙여진 것 같다.
군위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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