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홍경호 세상읽기-노추

얼마전 우연한 기회에 한 노정객(老政客)을 만난 적이 있다. 요즘 어떻게 소일하느냐는 우문(愚問)에 그분은 이렇게 답했다.

"건망증이 점점 더해져서 고민이오. 이러다가 혹시 치매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산책도 하고 등산도 하고 무엇보다 적게 먹고 욕심을 버리는 일에 힘쓰고 있소"

그 분을 잘 아는 사람한테 사실여부를 알아보았더니 사실이라고 했다. 그 분의 지난 행적이나 정치적 소신 때문에 그 분에 대해서 약간의 반감과 환멸을 느껴오던 필자는 앞으로는 그를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비록 형편없는 인물이었으나 그러나 그는 적어도 죽음을 준비할 줄은 아는 사람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고 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 나름이겠지만 노추가 그것이 아닌가 싶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늙어 추하면서도 욕심과 심술은 여전한 늙은이. 하지만 노년을 곱고 깨끗하게 보내는 사람도 많다. 몸은 비록 쇠했지만 외로운 학처럼 고고하게 늙어가는 노년이라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등산길에서 산 좋아한다는 전직 대통령을 만난다. 그 분은 졸개 하나 거느리지 않은 혼자 몸으로 힘써 산을 오르다가 양지바른 언덕에서 쉬는 중이다. 다가가 인사하고 촌부들이 나눌 덕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구태여 그 분의 공과(功過)를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전직 대통령의 돌출행각이 세간의 화제로 등장했다. 구경감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한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 몇 시간씩 우유 곽에다 오줌을 누어가며 농성을 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분을 보면서 연민과 환멸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구대상으로 그 분을 강연에 초청했다는 교수의 저의는 과연 순수한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학문연구는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것이 혹시 한 교수의 공명심에서 착안된 발상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치가 강단조차 오염시켜 이 꼴로 만들었다.

전직 대통령의 망발은 오늘도 계속된다. 노벨상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아무개는 대통령감이 못되고 아무개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 어느 지방과 어느 지방이 똘똘 뭉치고 어쩌고 저쩌고….

산악회 현판식을 갖는 그 분과 그 곁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한물간 정치인들의 면면이 실린 신문을 본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현판 같은 것을 내걸지 않는다. 조증(躁症) 환자들의 잔치를 보는 서글픈 느낌이다.그뿐인가. 요즘 세간에는 현직 대통령의 욕심에 대한 우스개도 떠돈다. 이분의 대통령병과 노벨 평화상에 대한 수상병은 그것을 이룸으로써 치유되었으나 그러나 좀더 오래 살고 싶어하는 장수병(長壽病)은 절대로 고쳐질 수 없을 거라나 뭐라나.

어리석은 백성의 실없는 우스개라 웃고 넘기고 또 그렇게 해야 마땅하지만 왜 우리 백성이 대통령을 두고 이런 자조적인 농담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 정객들의 끝이 없는 탐욕과 망상, 그리고 식언과 변신으로 점철된 권모술수가 우리를 너무나 실망시키고 식상시킨 결과가 아니겠는가. 물러날 때와 퇴진할 때는 물론이고 늙음이나 죽음조차 받아들일 줄 모르는 용렬한 무리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우리 백성이 불쌍하다. 대지(大地)는 우리에게 형체를 부여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삶을 살아가도록 하고, 우리를 늙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죽음으로 우리를 쉬게 한다. 삶을 받았으니 살아갈 뿐이고, 늙음을 주니 평안하게 이를 받아들일 것이며 죽음을 주니 편히 쉴 뿐이다.

한양대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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