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플레이어, CD롬 드라이브, 광통신, 근시교정, 피부반점 제거수술. 앞서 열거한 것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레이저다.
자연상태에선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빛 레이저를 인간이 만들어낸지 50년이 다 돼 간다. 약 반세기동안 레이저는 인간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달과 지구사이의 거리를 레이저를 이용해 정밀 측정한 것. 레이저는 다른 빛과 달리 진행하는 과정에서 거의 퍼지지 않아 측량분야에서 많이 쓰인다. 지난 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갔을 때 설치해 둔 레이저 반사장치를 이용해 달과의 거리(약 38만4천km)를 정확하게 잴 수 있었던 것도 레이저의 유별난 직진성 때문이다.
붉은색으로 대표되는 레이저의 세계에 격랑이 일고 있다. 청색레이저의 등장이 바로 그것. 붉은색에 비해 파장이 훨씬 짧은 청색레이저가 만들어짐으로써 인류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경험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됐다.
◇ 레이저란 무엇인가
청색레이저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레이저의 기본 성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레이저(LASER)는 영어로 'Light Amplified Stimulated Emission Radiation'의 약자다. '유도방출된 빛을 증폭시킨 것' 정도로 풀어쓸 수 있다. 여기서 키워드는 바로 유도방출이다.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가 원래 위치보다 높은 곳(즉 에너지가 높은 상태)에 있을 경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저절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성질을 갖는다. 이렇게 낮은 곳으로 떨어질때 전기, 빛, 열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런 현상을 자연적으로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전자를 동시에 높은 에너지 위치에 있도록 만든 뒤 한꺼번에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유도방출(Stimulated emission)이다.
유도방출시 나오는 빛은 전자 1개가 떨어질때 나오는 파장이나 위상은 똑같지만 에너지는 훨씬 많은 빛이 나온다. 레이저는 단일한 파장으로 좁은 면적에서 방출되기 때문에 한데 모으기 쉬운 장점을 지닌다. 이렇게 모아진 에너지는 매우 강력해서 순간적으로 텅스텐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정도다. 레이저 무기는 이런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 청색레이저가 등장하기까지
레이저의 성질은 유도방출을 일으키는 발광재료에 달려있다. 발광재료로는 기체, 고체, 반도체가 있다. 기체와 고체 레이저는 반도체 레이저에 비해 출력이 크지만 발생장치의 크기가 크고 전력소모가 많아 응용분야에 제한이 많다.
컴퓨터의 발달과 더불어 정보저장능력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반도체 레이저의 인기가 높아졌다. 반도체 레이저는 적색이나 적외선 영역의 파장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레이저하면 붉은색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유도방출되는 반도체 소자를 레이저 다이오드(Laser Diode)라 부른다. 반도체 레이저의 파장은 다이오드에 따라 결정된다.
현재까지 레이저 다이오드로 실용화된 물질로는 갈륨비소계(GaAs), 인듐인계(InP) 화합물 반도체다. 이들이 낼 수 있는 파장은 노란색보다 긴 쪽이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레이저는 모두 붉은색 계통 일색이었다. 과학자들은 이보다 짧은 파장의 레이저, 즉 녹색이나 청색레이저를 만들 수 있는 반도체 물질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노력의 산물이 바로 갈륨질소(GaN ; 갈륨나이트라이드)계열의 질화물 반도체다. 질화물 반도체는 구성물질인 알루미늄, 갈륨, 인듐의 조성비에 따라 200㎚(나노미터 = 1억분의 1m)의 자외선부터 600㎚정도의 노란색까지 발광할 수 있다. 청색레이저를 낼 수 있는 물질로서의 가능성은 70년대 초반 입증됐으나 성능이 뛰어난 단결정을 만들기 어려워 그간 실용화되지 못했다. 이를 최초로 상용화하는데 성공한 곳은 일본 니치아사. 지난해 말부터 410㎚급 DVD용 청자색 레이저 다이오드를 시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다.
◇ 꿈의 저장매체를 가능토록 한 청색레이저
그렇다면 왜 과학자들은 그토록 짧은 파장의 레이저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철판에 홈을 새겨서 글씨를 쓰는데 각 획의 굵기는 1mm다. 기계를 이용해 철판의 글씨를 읽어내려면 기계에 달린 바늘의 굵기가 1mm보다 적어야 한다. 철판에 글씨를 좀더 촘촘히 새기기 위해 획의 굵기를 0.㎜로 했다고 가정하자. 글씨를 읽어내려면 바늘의 굵기도 당연히 0.1㎜ 이하로 가늘어져야 한다. 만약 아무리 미세한 글씨를 새기더라도 이를 읽어내는 바늘을 만들 수 없다면 철판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레이저는 바로 글씨를 읽어내는 바늘로 생각하면 된다. 파장이 짧을수록 보다 정밀한 홈의 글씨를 읽어낼 수 있다. 대신 레이저는 철판에 새겨진 글씨가 아니라 CD롬에 새겨진 신호를 읽어낸다. 짧은 파장의 빛으로 CD롬에 신호를 새기면 그만큼 많은 양의 정보를 더 담을 수 있다. 문제는 새겨넣은 신호의 굵기(파장)만큼 읽어내는 레이저의 파장도 짧아져야 하는데 종전의 붉은색으로선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CD에 정보를 기록하거나 읽는데는 알루미늄갈륨비소계의 파장 780㎚급 근적외선 레이저를 사용하고, DVD에는 알루미늄갈륨인듐인계의 635㎚급 붉은색 레이저를 사용한다. 붉은색 레이저로는 72분짜리 음악 또는 15분짜리 비디오를 담는 CD, 4.7GB를 저장하는 DVD 밖에 만들 수 없다. 영화 한 편도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셈이다.
결국 저장밀도를 높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 먼저 해결돼야 할 문제가 바로 청색레이저다. 질화물 반도체의 경우 410㎚ 정도의 청자색 레이저를 만들 수 있다. 이를 이용하면 보통 화질의 영화 4편, 고화질 TV용 영화 2편을 DVD에 저장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저장매체의 혁명이 일어나는 셈이다. 세계 유수의 전자업체들이 청색 레이저 개발에 발벗고 나서는 이유는 차세대 저장매체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다.과학자들은 청색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 파장 15㎚(머리카락의 수천분의 1)까지 구현 가능한 극한의 빛에 대한 연구가 일본에서 진행 중이다. 이런 빛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기존의 CD 한 장에 수백장의 DVD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게 된다. 레이저를 이용한 저장매체의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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