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깊은밤 깊은 맛

어릴 적 초롱불 밑에서 지내던 겨울밤은 왜 그렇게 캄캄하고 길었던지. 그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배고픈 아이들의 눈은 별보다도 더 초롱초롱 했으리라. 북두칠성의 국자가 기울면, 우리는 어김없이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서리맞은 뒤에 따다가 단지에 재여 둔 고욤을 한 그릇씩 퍼다 먹기도 하고. 제사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빨간 홍시에 송편을 찍어먹기도 하고. 그나마 없을 때는 지난 가을햇살에 말려둔 감 껍질을 먹었다. 어쩌다 두꺼운 감 껍질은 거의 곶감 맛이 났다. 할머니가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하는 밤에는, 호랑이보다 먼저 내가 침을 삼켰다. 그러나 곶감은 할아버지가 벽장속 깊숙이 숨겨두고 직접 관리하므로, 거의 먹을 수 없는 꿈속의 간식이었다. 혹시 눈덮인 마당을 잘 쓴 날이나 감기 기운이 있는 날에는 곶감을 맛볼 수도 있었다.

화롯불이 풍성한 날에는 마루 밑에 묻어두었던 밤이나 하얀 떡가래며 인절미를 구워먹기도 했다. 구운 떡을 꿀에 찍어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화롯불로는 달걀밥도 해먹었다. 달걀을 조금만 깨어서 적당히 마신 다음, 그 안에 쌀과 물을 넣고 닥종이로 입구를 발라서 화롯불에 익히면 된다. 그윽한 쌀밥 냄새가 풍기면 삶은 달걀 까먹듯이 먹으면 되었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뒤뜰에 묻어둔 무며 배추뿌리를 깎아 먹었다.

이번 겨울에는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맛있는 것들을 먹어봤으면 참 좋겠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도 이런 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그들은 나의 할아버지가 심어놓은 감나무와 밤나무를 베어내지도 않을 것이요, 따스할 때 춥고 긴 겨울밤을 준비하는 이 땅의 오랜 존재방식도 배울 것이다.

대구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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