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에는 대구 프린스호텔에서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초청하여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 입시설명회를 열게 되어 있어 학교 버스를 타고 대구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루 전날 갑자기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고속도로 사정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도 고속도로보다는 철도를 선호하는 편이어서 차라리 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과연 고속도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분노한 농민들이 고속도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열차를 타고 대전도 채 가지 못했는데 벌써 고속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수많은 차들이 꼼짝 못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물론 달리는 기차 속에서는 분노한 농민들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천, 수만의 농민들이 하나가 되어 외치는 목소리는 나의 가슴을 때리는 듯했다. 전국 21개 농민 단체들이 총 172개 시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가부채 특별법 제정을 위한 100만 농민 총궐기 대회'를 연 것이다.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연의 힘과 씨름하며 묵묵히 땀흘려온 농민들이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들의 요구를 들어보자. "정부의 농정 실패로 농가 부채가 38조원에 이르렀다" "정부는 농가부채 상환을 유예하고 이자를 감면하는 내용의 특별조치법을 즉각 만들고 농축산물의 가격을 보장하라" "파산 직전 농업에도 공적자금 투입하라" 이런 내용들이 농민들의 요구이다.
사실 농가당 평균 부채가 수백, 수천만 원씩 된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만 해도 당시 농촌활동에서 농민들을 만나면 그분들은 한숨을 푹푹 쉬며 '농사를 쌔빠지게 지어봤자 말 짱 헛것이여!'라고 한탄을 하곤 했다.
돌이켜보자면, 한국 경제개발의 역사는 농민 축출의 역사였다. 즉 1950년대만 해도 70%였던 농어민이 1970년에 50%로, 1980년엔 34%로, 1997년엔 10%로 급감했다. 경제정책의 핵심이 수출산업화 전략이었기에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느라 대부분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했다. 또 이들이 저임금으로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쌀 등 농산물 값을 가능한 한 낮추어야 했다. 결국 농민과 노동자는 수출산업화 전략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WTO체제에서 미국이나 중국 등지에서 값싼 농산물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농민들의 마지막 남은 생산의욕마저 철저히 짓밟는다. 기계영농, 시설농 등 정책 대안이랍시고 나온 것들이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개 높은 부채만 남겨 주고 말았다. 높은 부채와 가격 폭락에 좌절한 사람들이 올해만도 6명이나 자살했다. 한편, 곡물 자급률이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그나마 기계나 비닐하우스 등 석유를 사용해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급률은 10%도 안 된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외국에서 값싼 농산물이 들어오면 더 좋아할 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엔 두 가지 위험이 있다. 하나는 국내 농업이 그런 식으로 파산했을 때 나중에는 외국 식량과 곡물, 야채들이 무기로 돌변한다. 삶의 자율성을 외국의 농업 자본가들에게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다. 둘째, 엄청난 방부제와 농약이 무더기로 들어간 농산물을 장기간 먹다 보면 건강과 안전에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이미 여러 종류의 발암이나 환경호르몬들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고 있다. 따라서 농업 문제는 산업 구조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회적 존재 방식의 문제이다.
이제부터라도 근본으로 돌아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물론 당장에는 분노하는 농민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부채 탕감 정책이 급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전략이요, 산업전략의 근본 전환이다. 첫째, 종속과 독점을 초래하는 수출산업화 전략을 버리고 경제의 자립성, 자족성을 강화하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한 원칙 위에서 상부상조하는 국제 교류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건강한 농업 등 '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자치 경제를 세워야 한다. 셋째, 거대 영농이 아니라 소규모의 자족적이고 유기적이며 자연 및 인간 친화적인 두레 영농 방식을 촉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창의성과 다양성이 살아 숨쉬는 풀뿌리 공동체들을 풍성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다. 우리는 물론 우리 후손도. 강수돌
고려대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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