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이 되고 싶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 학생 신분을 속이고 향촌동 나이트 클럽에 들락거리며 웨이터로 차곡차곡 '연예계' 경력을 쌓았던 이른바 '농땡이'.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고교 졸업장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신문팔이로 학업을 마친 '의지의 한국인'. 음반을 냈지만 가수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야 했던 청년. 그리고 전화선로 수리공이 돼 버린 두 아이의 아버지. 지금은 이웃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거리의 연예인'.수줍음 많아 보이는 얼굴에 키 작은 남자 진대식(53)씨. 대구 두류2동에 사는 그의 삶에 관한 짤막한 보고서이다.
진씨는 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오토바이 탄 전화 선로 보수원이다.
작업복에 헬멧. 그탓에 착 달라 붙어버린 머리카락. 잠시도 쉬지 않고 터지는 휴대폰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분주한 출동. 눈을 감고도 고장 난 곳을 금방 찾아내고 척척 수리한다. 20여년 경력. 만만찮은 감각을 체득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도 틀림없는 '연예인'이다.
이제 잊혀져 버렸지만, 30년 전에는 음반을 내기까지 했다.
고교생 시절 라디오 방송의 장기자랑에 나가 코미디 부문에 입상한 경력도 있다. 졸업 후 서울의 한 레코드사 신인 가수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가수의 길로 나섰다.
1972년에 낸 첫 음반 타이틀 곡은 '행복해주오'. 라디오 방송 마다에서 노래가 흘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난한 진씨에겐 PR은 커녕 방송사 관계자와 식사 한번 같이 할 여유도 없었다. 요즘과 달리 능력 있는 매니저가 스타를 만드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의 노래는 잊혀졌다.
극장 쇼와 밤무대를 전전했다.
그러다 결국 낙향했다.
대구 남산동에서 주부 가요교실을 열었지만 역시 실패. 인쇄소에도 잠깐 근무했으나 도무지 적성에 안맞았다. 1976년 대구 전화국 입사. 그 뒤부터는 전봇대에도 오르고 아슬아슬한 건물 외벽에도 매달린다.
열정도 있었고 재능도 있었지만 끝내 스타가 되지 못한 진씨. 대신 체념으로 젊은 시절 꿈의 빈자리를 채웠었다. 하지만 그의 체념이 패자의 자기 위안은 아니다.
더 이상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그의 노래가 흐르는 일은 일은 없지만, 그뒤 다시 '연예인'으로 부활했기 때문. 거리의 가수, 잔칫집의 MC, 무대 위의 개그맨이 된 것이다.
그가 자선 거리 공연을 시작한 것은 20여년 전. 전화국 입사로 생활이 안정된 뒤였다. 고교생 시절 재주 있다는 이유로 별 생각 없이 참가했던 위문공연이 문득 떠올랐다. 그 대단찮은 솜씨에도 행복해 하던 사람들, 그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이제 인기는 목표가 될 수 없는 일.
대구 연예인협회에 부탁해 자선 공연단을 구성했다.
북 치는 사람, 장구 치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묘기 가진 사람들이 동참했다. 야간 업소 근무에 지친 그들이 선뜻 나서 주겠다고 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설을 찾아다닌 것이 벌써 20년. 양로원·고아원은 물론이고 소년원도 찾아 흥을 돋운다. 경로잔치, 마을 잔치… 요청이 있는 곳이면 그런 곳도 마다 않는다.
꼭 필요한 자리에는 휴가를 내서라도 참가한다.
공연을 하노라면 후원품이나 성금을 슬그머니 건네는 사람들도 있다.
그 속에는 헌옷도 있고 비누·샴푸도 있다.
이런 것들은 공연 때 함께 불우시설들로 간다.
일상에 매인 탓에 공연단 규모와 구성원은 때마다 바뀐다.
그러나 공연은 계속돼야 한다.
자연히, 함께 공연할 사람들을 찾는 것도 진씨(016-530-0304)의 일이 됐다.
재능 있는 사람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할아버지·할머니 어깨라도 주물러 주면 될 터. 공연단엔 입회비도 없지만 보수도 없다. '뜻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가슴이 아파도 울지를 말아요. 이제 와서 운다고 될 일도 아닌데…" 진씨의 음반 타이틀곡은 진작부터 뭔가를 말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눈물이 아니라 신명이라고.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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