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동료 교수 한 분이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리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위로 두 명의 딸과 아래로 아들 하나를 두었다. 두 딸은 대단한 미모를 가졌고, 부인은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지나치게 헌신적이었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본디부터 총명해서인지 두 딸은 당시로서는 모두가 선망하는 소위 명문 여자대학을 나왔고, 졸업 후에는 집에서 신부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색(才色)을 겸비한 이 딸들은 좀처럼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작은 짝을 고르는 이들의 눈이 너무 높았던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나중에는 남성에 대한 이들의 지나친 조심성과 소극적인 자세도 문제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남녀 공학하는 대학에 보낼 걸 후회가 되고, 바깥에 나가서 연애 끝에 짝을 구해 오는 다른 집 딸들이 부러웠다.
이럭저럭 딸들의 나이, 서른을 넘어서니 혼담도 뜸해졌다. 그때부터 부모는 몸이 달아서 백방으로 애를 쓰는데 정작 당사자인 딸들은 태평이다. 아버지는 퇴근 후 집에 들어가는 것이 끔찍하다고 했다. 늙어가는 딸들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다.
큰딸의 나이 33세에 이르렀다. 딸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태리에 가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랜 고민 끝에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시집보낼 때 쓸 혼수 비용 전부를 내놓으면서 딸과 영결을 했다."이것으로 네가 소원하던 공부를 하든, 그곳에 가서 서양 사내와 결혼을 하든, 이것으로 부녀(父女)의 인연을 끊자".
이렇게 해서 그는 딸과의 연을 끊고(?), 큰딸부터 외국으로 떠나보냈다. 진작에 그랬어야 할 일이었다.
몇 년 전 입학시험 때였다. 면접고사장에 들어서니 이상한 광경이 목도되었다. 교실 하나에다 백 명 가까운 학생들을 앉혀 놓고 문답하는, 형식절차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 결과가 합격 불합격과는 상관없고, 수험생은 해당 시간에 면접에 응하기만 하면 된다. 학교나 학부모나 수험생 자신이나 모두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정인데, 교실에 들어서니 5, 6명의 학부모가 수험생들 틈에 끼어 앉아 있다. 수험생이 갑작스런 발병을 했거나 교통사고라도 당해서 혹시 부모가 이것을 신고하기 위해서인가 확인했더니 그것이 아니고 아이를 혼자서 보낼 수 없어서 함께 왔다고 대답한다.
학부모께서는 퇴실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으나 이들은 묵묵부답으로 응하지 않았다. 거듭 퇴실을 요구하자 이들은 몹시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교실 바깥으로 나가더니 유리창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본다. '마마 보이'니 '과보호'이니 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지만 너무나 황당한 광경에 기가 막혔다. 자식의 장례식(葬禮式)도 부모가 치러 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려는가.
요즘 대학을 나오고서도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자식들이 점점 늘고, 결혼을 시켜서 따로 살림을 내놓고도 이들의 생활비마저 부모가 대주는 가정이 많아진다고 한다. 무위도식하는 과년한 자식들이 쓰는 통신비며 교통비, 유흥비를 벌기 위해서 여전히 일손을 못 놓고 허우적거리는 노년의 고달픔이여! 자식을 너무 싸고돈 탓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부실기업 퇴출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면서 과감하게 자를 것은 잘라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우리의 정서 속에는 당연히 따로 독립시켜할 것을 독립시키지 못하고, 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못하는 빗나간 인정(人情)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 정서가 바뀌지 않는 한, 구조조정도 한갓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손가락 하나를 아끼고 불쌍하게 여기다가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가려면 철저하게 그리로 갈 것이고, 개인주의를 따른다면 철저하게 개인주의자가 될 것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 뒤죽박죽이 지금의 우리 꼴이다.
한양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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