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출신 수필가 구활(具活)씨가 세번째 에세이집 '시간이 머문 풍경'(눈빛)을 출간했다. '구활의 우리 문화유산 답사 에세이'라고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답사란 형식을 빌렸을 뿐 기존의 답사기와는 사뭇 다르다. 형식에 꺼리낌없이 다양한 문학장르와 기자시절에 체득한 풍부한 경험 그리고 눈에 잡힐듯 답사지에서 손수 그린 표지그림과 삽화까지 모든 내용들이 마실수록 깊은 향이 감도는 연엽주같은 에세이집이다. IMF 와중에 직장을 잃고 마음을 비운채 석달 보름동안 계속한 문화유산 답사, 거기서 얻은 사유의 흔적과 문화유산에 서린 이야기들은 유홍준의 답사기와는 또다른 인생의 맛을 지닌다.
"강릉 운정동에 활래정(活來亭)이란 정자가 있어요. '활(活)이가 와야 이름이 완성되는 정자'. 200여년 전 바로 그곳에서 내 선조와 정자의 주인이 펼쳤을 풍류와 예언이 드라마의 장면처럼 떠오르면서 답사기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의 답사 에세이는 그런 내용들이다. 늘 그랬듯 영천 은해사에 가면 넓은 솔밭 사이를 서성였을 네살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은해사를 배경으로 남긴 단 한장의 빛바랜 사진을 붙들고 갑년이 가깝도록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있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 앞에서는 문득 '예술적 오르가즘'에 빠져들었다. 심취한 그림이나 음악을 대할 때 처럼. 대웅전 추녀 밑에서 처마를 떠받치는 벌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나부(裸婦)상을 보고 절을 지었던 도편수와 주막집 아낙과의 애증을 이끌어낸다.
"경주의 고분군을 찾으면 나는 먼저 서봉총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곳에 구스타프 스웨덴 황태자와 한국인 고고학도, 일본인 박물관장과 기생 월영과의 기막힌 사연 때문이지요".
경기도 안성땅 비석거리를 둘러본 그는 비석에 얽힌 얘기들을 풀어나가면서 오늘의 황폐한 정치상황을 질타하고 참된 삶을 깨우치는 죽비를 들기도 한다. 해병대 전차대대장 출신인 불국사 서인(西印) 스님의 행적과 비오는 날 절 풍경은 스님이 저자에게 준 한벌의 승복처럼 지울 수 없는 여백으로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그리운 날의 추억제'(문학세계사.1990).'아름다운 사람들'(책만드는 집.1997)에 이어 세번째 답사 에세이를 낸 그는 "다시 시작해야지…"라며 밀짚 모자를 눌러쓰고 바람처럼 홀연히 길을 나선다. 그의 가슴에 또 어떤 미완의 에세이가 담겨 있을까.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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