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보시오 벗님네들 이내소리 들어보소

(22)신명 돋우며 일 격려하는 모내기 소

모내기철이면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모내기 현장에 나와서 직접 모내기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 이후 오랜 관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여야 대표가 모내기 행사를 한 모양이다. 이들은 으레 농민들과 모여서 들밥을 나누어 먹고 막걸리 잔도 주고받는 소박한 면모를 연출하는데, 만일 언론이 요란스레 보도하지 않는다면 과연 모내기판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까.

정치인들이 모판에 행차하여 법석을 떨기보다 제 집무실에서 농정이나 제대로 펼치는 것이 훨씬 낫다. 농업정책은 무대책인 가운데 논바닥에 나와 잠깐 모내기 시늉을 하며 생색내는 일이야말로 낯간지러운 일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일전에 여야 정치인과 각료들이 모여 경제정책을 밤새워 논의한 것이야말로 모처럼 장한 일을 한 셈이다. 모내기는 농군들에게 맡기고 정치인들은 정치모판을 잘 가꾸는 데 진력해야 농민들도 살고 나라도 산다.

이 물길 저 물길 다 열어놓고

쥔네 양반 어데 갔나

첩의 집에 갔거들랑

별 지기 전에 돌아오게

영월 사는 이남순 아주머니의 모내기 소리다. 모내기할 때 가장 긴요한 것이 물대기이다. 물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모내기를 할 수 없다. 논을 깊이 갈고 물을 대어서 써레질을 해야 하는데, 이 때는 평소보다 논이 물을 많이 먹는다. 따라서 모내기를 다투는 철에 요즘처럼 날이 가물면 물꼬 싸움이 멱살잡이로까지 발전한다.

주인 양반은 물꼬만 열어 놓고 첩의 집에 놀러갔다. 다른 노래에서, 쥔 양반은 '문어와 큰 전복을 손에 들고 첩의 집에 놀러갔다'고 한다. '무슨 놈의 첩의 집에는 밤에도 가고 낮에는 또 뭐하러 가는가' 하고 물으면, '밤에는 잠자러 가고 낮에는 술 마시러 간다'고 응답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첩의 집에 놀러간 사실을 인정하면서 별이 지기 전에 돌아오라는 최소한의 당부만 한다. 농번기라도 양반은 일하지 않는 특권과 첩의 집에서 외박할 수 있는 특권을 함께 누린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양반남성이 누릴 수 있는 신분적 특권이 고스란히 불거져 있다.

여기두 하늘 방이께 신발을 벗구서 들어들오소

하나둘루 꼽더래두 삼배출짜리만 꽂어주게

천하지대본은 농사로다 농사에다 심을 씨세

안성 사는 김기복 어른의 소리이다. 모를 심는 논을 '하늘방'으로 절묘하게 나타냈다. 모내기 논은 쟁기질을 하여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하여 두었으므로 발이 푹푹 빠지고 흙물이 번진다. 때로는 거머리도 달라붙고 땅강아지도 헤엄쳐 다닌다. 논둑에 서면 얼른 신발을 벗고 논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잔뜩 어설픈 느낌이 든다. 그러나 논에 들어서면 물이 가득한 논에 푸른 하늘이 물 속에 잠겨 있고 무른 논바닥으로 발도 편하다. 따라서 논바닥이 하늘방이나 다름없으니 얼른 신발을 벗고 들어들 오라 재촉한다. 그리고는 3배 소출이 나도록 모를 꽂아달라고 한다. 잘 익은 벼를 몇 배로 거두어들일 때를 생각하면 희망적이다. 그러므로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알고 힘을 써보자고 부추길 수 있다.

아무렇게 심더래두 사방출루 심어주소

배가 고픔 밥을 주고 목이 마르면 술을 주지

여보시오 농부님네 신명이 절루 나게끔

한나 둘이 하더래두야 둘셋씩 하는 듯이

안성에서 신석천 어른이 부른 노래이다. 아무렇게나 심어도 네 배 소출이 나도록 심어 달랜다. 그렇게만 심으면 밥도 주고 술도 줄 터이니 신명을 내서 한둘이서 심더라도 두셋이서 심는 듯 힘을 쓰라는 말이다. 주인의 처지에서 모내기 일꾼들을 독려하는 소리이다.

이 농군들 잘도 허네

우리 농군들 잘도 헌다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뒷산은 점점 가까워지네

월출동녘에 달 떠오고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네

풍년일세 풍년이여

금년에도 풍년일세

신안군 이문식 어른의 앞소리이다. 뒷소리를 '어기야 어기여루 상사듸여'하고 받았다. 농군들이 일을 잘 한다고 한껏 부추기는 노래이다. 일 하는 사람에게 '잘 하라'고 독려하는 것보다 '잘 한다'고 부추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쫓기는 듯 일하는 것보다 칭찬과 격려를 들으면서 일하는 것이 더 신명나기 때문이다. 신바람 나서 일하면 일의 효과도 빠르다. 농군들이 논바닥에서 앞산을 향해 엎드려 뒷걸음질을 하며 모내기를 하므로,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점점 가까워진다. 그러다가 보면 하루해가 언제 다 갔는지, 동쪽하늘에 벌써 달이 뜨고 해는 서산으로 진다. 풍년가가 절로 나온다.

잘도 하네 잘도 하네

우리 군사들 잘도 하네

다 되어 가네 다 돼가네

서 마지기 논뱀이가

반달같이도 다 심아가네

먼디 사람은 듣기나 좋게

가찬디 사람은 보기나 좋게

고흥 사는 유기진 아주머니의 노래이다. 함께 모내기를 하는 두레패들이 농군들에게는 '우리 군사들'로 인식된다. 전쟁을 하는 군대조직처럼 농사일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지들이자 한 식구들이라는 말이다. 한 동아리 군사가 되어서 '어이여 어이여' 일을 하다 보면 넓디넓은 서 마지기 논뙈기도 어느덧 반달처럼 줄어들게 된다. 이처럼 신명이 나서 군사처럼 움직이는 농군들에게 모내기는 한갓 힘든 노동이 아니라 모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놀이행위이자 공연활동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모노래는 먼데 사람 듣기 좋도록 흥겹게 부르고 모내기 일은 가까운 사람들이 보기 좋게 어깨춤이라도 추며 한다는 것이다. 일의 신명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이 논 심구고 저 뱀이로 가세

떳구나 떳구나 못방우가 떴네

홀엄씨 오강에 똥덩이가 떴소

저그 과부가 영도나 잎이나

이 뱀이 심구고 웃뱀이로 가세

화순 사는 백남현 어른의 노래이다. 이 논이 끝나면 다시 저 논으로 가야 하듯 모내기 일은 끝이 없다. 그래도 한 뙈기 모내기를 끝내면 잠시 허리를 편 채 쉴 수 있다. 모내기를 막 끝낸 논을 돌아보니 모포기가 더러 물에 떠 있다. 노래를 부르며 신바람 나게 심느라 정확하게 심지 못한 모들은 물에 뜨게 마련이다. 그걸 두고 홀어머니 요강에 똥 덩이가 뜬 것이나 과부의 부정한 행실에 비유하며 웃음을 즐긴다.

일에 신명이 나면 이처럼 잘못한 일을 두고도 우스개를 할 수 있다. 최근 경제부처 각료들과 여야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경제현안을 논의하여 모처럼 국민들의 이맛살을 펴게 했다. 입으로는 '상생'을 말하며 행동으로는 '상극'을 치닫던 여야가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함께 애썼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의 정치불신을 씻어주는 단비 구실을 한 것이다. 모꾼들이 '이 논배미 다 심그고 저 논배미 넘어가세' 하며 일의 연속성을 일깨우듯이, 공교육 불신 문제나 남북교류 문제, 건강보험 재정파탄 사태 등 국가현안 문제들을 계속 다루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당파를 초월한 이번 합숙토론회도 정치인들의 생색내기 모심기 행사처럼 일회용 반짝 시도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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