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루과이 라운드 10년 우리농업 어디로 가고 있나

(8)농산물 유통구조개선사업

"정부 말 믿었다가 망한 사람이 저뿐이겠습니까? 억대 기계를 버려야 하는 심정을 어떻게 다 말로 하겠습니까". 경산 진량면 다문리에 '홍익 영농법인'을 만들어 농산물 산지유통(포장) 센터를 운영했던 김진우(39)씨의 일은 농산물 유통 개선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었다.

김씨는 1996년에 정부보조 4억원, 자부담 8억원 등 12억원으로 마늘·양파·무 등 포장 사업을 시작했다. 농업전문대를 졸업하고 1987년 농민후계자로 선정돼 활동하던 중 국가가 1992년부터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하자 거기에 승부를 걸었다. 이미 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7개국과 일본의 앞선 유통구조를 눈여겨 봤던 터라 우리 농산물에도 소포장 판매 시대가 오리라는 확신이 섰다. 마늘·밤·감자를 포장하는 2억원짜리 기계, 백화점 납품용 1억원짜리 포장기, 수천만원 짜리 최첨단 장비들도 사들였다.

전국의 유통업체에서 잇따라 견학왔다. 백화점·할인점 납품도 순조롭게 풀려 월 2억원 어치의 납품량도 확보했다. 정부가 학교급식을 외부 공급토록 한다는 정책을 발표한데 맞춰 '학교급식 센터'까지 설립했다.

그러나 4년만이던 작년 12월 1천700여평 공장을 경매로 날리는 것으로 결과지어졌다. 너무도 찬란했던 꿈이 꿈으로 끝나던 순간이었다. IMF사태가 몰고 온 고금리의 자금 압박, 소규모 포장업체들과의 피할 수 없는 납품가 경쟁… 공장 설립 첫해였던 1997년 35억원이나 됐던 매출액은 98년도 23억원, 99년도 7억원으로 날로 추락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

"물론 제가 경영을 제대로 못한 점도 있지만, 정부의 정책 혼선 탓도 큽니다". 정부는 자금을 지원하고도 후속 관리와 지원은 내팽개쳤다고 했다. 소포장은 물류센터 등에까지 개방해 버렸고, 발표와 달리 학교의 외부급식은 금지시켜 버렸다. 억대의 포장기, 수천만원 짜리 대파까는 기계, 11개의 냉장 창고, 사과 선별기, 진공 포장기, 랩 포장기, 농산물 자동 이송기, 양념 다짐기 등에는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군위 효령농협 공판장 창고. 거기서도 5천500만원짜리 사과 선과기, 2천400만원 짜리 콘베이어 시스템이 먼지만 뒤집어 쓴 채 녹슬어 가고 있었다. 1993년 13억5천만원(정부보조 5억원, 융자 2억원, 자부담 6억5천만원)으로 지은 청과물 유통시설(공판장)이 제 역할을 잃은 것.

선과기는 사과 생산량이 급감해 할 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 탓에 한해 14억~15억원 되던 매출액이 지금은 5, 6억원으로 떨어졌다. 정백찬(60) 농협장은 "청과물 유통시설 공간을 인근 농협 농산물 집하장으로 내 주고 있다"고 했다. 홍영덕 상무는 "정부보조금으로 산 것이라 기계는 놀아도 처분도 못하고 그냥 썩히고 있다"고 했다.

대구경북 능금농협은 대기업 횡포로 멍 든 경우. 전국 처음으로 능금주스 생산기술을 개발, 군위 의흥면 원산리 1만7천평에 국비·지방비 보조금 65억원과 융자금 14억원, 자부담 203억원으로 1993년 사과 가공공장을 차렸다. 투자는 계속돼 모두 430억원이 들어갔다.

사업도 잘 돼 첫해 143억원이던 매출은 다음해 326억원으로 폭증했다. 하지만 그뿐, 이 사업이 돈 된다 싶자 대기업들이 너도 나도 뛰어 들어 사과·배 또는 다른 과일의 유사 제품을 잇따라 내놨고, 아예 소비자 입맛마저 바꿔 버렸다. 갈수록 판매가 어려워져 가동 3년째부터 적자에 빠지더니 작년에는 매출이래야 겨우 155억원에 그쳤다.

"대기업들의 무차별 공세로 매출이 크게 떨어져 연간 6만t의 가공 능력 중 절반은 그냥 놀리고 있습니다. 막대한 자금과 광고를 앞세우는 대기업을 상대하기가 벅찹니다". 박춘열(53) 상무는 시설이나마 제대로 가동되도록 하려고 작년엔 판매전담 자회사를 설립했고 올해는 OEM(주문자 상표 생산) 방식으로 다른 기업의 제품을 생산하는 등 다른 쪽에서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했다.

RPC(미곡 종합처리장)의 장래도 어둡다. 1991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전국 330개의 RPC마다 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어 나 경영난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 40억원을 들여 1996년에 만든 영덕 병곡농협 RPC 경우, 작년에 사 들인 벼 6천t 80억원 어치 중 1천800t이 아직도 재고로 남아 있다. 지난해보다 배 이상 늘어난 양. 서석조(49) 전무는 "까딱하면 RPC 시설을 놀려야 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라고 했다. RPC 소장인 윤노수(50) 상무는 "다양한 판촉으로 경영난을 극복하려 하지만 쉽잖다"고 했다.

국비보조 10억 등 27억원으로 1998년에 RPC 사업을 시작한 영주 안정농협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이맘 때는 재고가 없었으나 올해는 작년 매입 벼 2천400t 중 무려 1천800t이 그냥 쌓여 있다. 박성영(56)씨는 "연리 5%로 지원받은 원료곡 매입자금 20억원중 남은 15억원 상환도 힘겹다"고 했다.

농협 경북본부에 따르면 농협이 운영하는 전국 199개 RPC 중 작년 결산에서 적자를 보인 곳은 무려 105개. 1997년 47개에서 이렇게 늘었고, 그해 3천만원(경북 2천200만원)이던 전국 RPC 평균 적자폭도 작년엔 6천100만원(경북 3천500만원)으로 커졌다.

RPC 위기는 쌀 소비 감소로 인한 재고 누적에다 쌀값의 계절 진폭(생산·구입기 가격과 출하기 가격의 차이)이 줄어 이익도 감소했기 때문. 1997년 4.2%이던 계절 진폭은 올 6월 0.6%로 떨어졌다.

농협 경북본부 유통지원팀 황홍달(46) 과장은 "계절 진폭이 원료곡 구입자금 금리에도 못미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고, 농림부 식량정책과 백영현 RPC담당은 "정부에서도 RPC의 경영난을 감안해 13억원인 운영자금을 15~20억원으로 늘리는 방안을 협의 중일 뿐 아니라 금리도 더 낮추는 쪽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UR대책으로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에 넣은 돈은 무려 4조원. 그러나 누수와 실책이 많아, 경북도청 유통특작과 박재종 과장은 "상당한 성과도 있었지만 무리한 투자, 사업자 선정상 문제, 경영능력 부족, IMF사태 등으로 문제도 있었다"고 말했다. 농림부 유통정책과 김일환씨는 "1998년 수립됐던 유통개혁 정책의 시행 착오에 대해 정부도 종합 점검 중이어서 곧 보완책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정창구기자 jc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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