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마음 넉넉한 여인을 향하여

서점에 갈 때마다 쳐다보기만 했는데, 오늘은 기어이 그 책을 사왔다. '부석사'라고 크게 쓰인 책표지가 눈을 끌어당기니, 모른척 하려해도 마음 한 귀퉁이에 호기심이 먼저 올라앉아 옴지락거리니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생각속에 있는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여 생각과의 현저한 차이를 나타낼 때 오는 허망함을 알기에 그런 상황을 스스로 사서 겪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러번 망설이던 끝이다. 더구나 제목만 부석사라 해놓고 부석사 근처에도 안가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더욱 재미없을 것이 아닌가. 어쨌거나 제목만으로 소설 '부석사'를 샀다. 그만큼 요즘들어 부석사는 정신의 먼곳에서부터 가까운 기억까지 크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곳에 가면 무량수전을 저절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경북 풍기에 있는 부석사는 보고싶은 무량수전과 같은 선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무량수전이 먼저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배우고 나서부터 그 건물을 마음에 새겼다. 그것에 대해서 배운지 수십년이 지났어도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미안함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은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이 소리높여서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 상견례도 없었는데,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을 다른 이들이 먼저보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고, 사는 형편은 또 어떻다는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는 고통이 컸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모른척 했다. 무량수전이 더 늙어버려 다른 이들의 관심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량수전은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움을 더 깊이에서 올려보내는가 보았다.

지난 여름휴가 때, 드디어 부석사에 갔다. 그곳은 누군가 말하기를 석양 무렵에 올라가서 해지는 광경을 보아야 제맛을 알게 된다고 했지만, 가는 길목의 소수서원에서 오래 지체했고, 서원 근처에 조밥 묵집이 있어서 저녁을 그곳에서 먹었기에 부석사가 있는 동네에 도착한 때는 어둠이 내리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다음날 아침에 찾아간 부석사는 의외로 조용했다. 산등성이를 지형대로 닦아서 절터를 잡았다. 몸은 구부려도 목을 바로 세워 먼곳을 바라보며 산으로 향하여 올라간다.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지나고 오르는 길을 따라서 석축을 쌓아 건물이 층층으로 지어져있다. 그래서 건물들이 이리저리 구불거린다. 석축 위에 세워진, 너무 오래되어 낡은 집들의 아담하고 친근한 모양이 절에 와 있다는 느낌을 감소시켜 문화재를 구경하고 있는 진지함이 솟아오른다.

드디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무량수전과 마주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꾸벅 하고 싶을만큼 무량수전은 안방마님처럼 모습이 넉넉했다. 건물이 들어앉은 자세가 편안하게 보여서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뎌온 단단함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낡은 추녀의 곡선이 완만하게 떨어져 내리는 곳에 서서 마냥 바라보았다. 건물을 보다가, 돌아서서 먼 산들을 보고, 건물 곁에 나란히 서서 같은 각도로 앞을 바라보기도 하며 서있었다.

경내를 천천히 돌아보고, 뒤뜰에 있는 부석(뜬돌) 앞에서 사진도 찍고 나서 무량수전과 마주한 안양문 난간에 앉아 눈앞에 전개된 산을 보았다. 산 뒤에 산, 산 옆에도 산, 산 위에 있는 산도 그 모습이 교만하지 않고 아담해서 산들이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형상이다. 그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을 보노라고 그런지 다른 이들도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주변의 넉넉함이 사람의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현장에 와 있지만 도저히 무엇이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묵묵히 앉아있을 따름이다.

여름휴가 이후에도 부석사는 계속 마음에 남아있었다. 오래 벼르고 별러서 만난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 아쉬워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부석사와 관련된 조그마한 것이라도 반가운 터에, 소설 부석사는 조금의 위로가 된다. 책을 사다놓고 바라만 보는 것이 흡사 예전에 무량수전이 보고싶어 마음 설레던 때와 다를 바 없다. 시간이 넉넉할 때 편안한 여인을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볼 것이다.

(류인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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