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헌영 세상읽기-평화가 그리운 이유

드디어 '테러에 대한 전쟁'이 포문을 열었다. 옛날 같으면 사돈네 쉰 김치 이야기쯤 여기고 팔짱 끼고 구경이나 할만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처지인데도 도대체 어인 성화인지 지구촌 전체가 초비상이다. 아마 이렇게 하려고 '세계화 시대'란 구호가 나왔었나 보다. 반 테러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미국이나, 공격에 찬성하는 모든 나라를 적으로 취급하겠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주장은 인류 역사가 무수한 피를 흘려 얻은 자유인의 선택권인 중립과 기권의 권리조차 말살시키려나 보다. 그래서일까. 줄줄이 미국의 공격 지지가 늘어나는 가운데 반대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중립조차 허용 않는 이 끔찍한 전쟁, 과연 이 전쟁으로 지상에서는 테러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올까?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 현정권만 무너뜨리면 세계는 테러범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평화를 향유할 수 있을까? 테러를 막는 유일 최선의 방법이 과연 이 길밖에 없었을까? 아니, 테러만 없으면 지상은 평화로울까?

이럴 때 좀 유식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역사가 바른 길로 가는 방향을 호소하여 인류 전체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 수는 없을까?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한 학자와 박사와 교수도 많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듯이 보이는 종교인도, 정론을 편다는 언론도 수두룩한데 대체 그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과연 인류의 평화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지금 우리는 21세기가 해야할 일을 하고 있는가?

만약 이 순간에 예수와 마호메트가 테러와 공격의 현장을 보게 된다면, 아니, 큰 욕심은 그만 두고 저 평화주의자 버트런드 러셀 경이나 양심적인 작가 사르트르 같은 지성만이라도 이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뭐랄까 들어보고 싶다. 소박한 생각으로는 100명이나 천명, 만이나 수백만 명의 빈 라덴을 죽여도 또 다른 라덴이 환경과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이건 마치 도둑을 잡기 위해 사형수를 늘이는 격은 아닐까. 사형제도가 엄격한 나라일수록 도둑이 성행하는 것은 사형 그 자체가 위하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테러와 반 테러 전쟁도 이런 반복은 아닐까?

응징으로 테러범의 훈련 기지나 테러 지도자를 압살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정권을 타도 할 수도, 국제적인 왕따를 만들 수도, 해당 국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가공할 무기와 공격으로도 한 인간의 가슴속에 묻힌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다스릴 수는 없다. 그 오묘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든 무기가 아니라 저 고전적인 자유. 평등. 박애에 입각한 사랑의 복음 뿐이다.

끔찍한 테러로 인류가 분노할 때 아마 테러범들은 더 이상 그런 행위를 반복하기를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응징이 엄청나버리면 도리어 응징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하여 테러로 저지른 죄악을 망각하고 또 다른 테러를 자행할 빌미를 줄 수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반테러 응징, 또또 테러, 또또 응징…. 이 시지프스의 신화는 자꾸 굴러 내릴 것이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이러는 가운데 세계인 전체가 긴장하여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일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경비 예산이면 아마 지구촌 난민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철통같은 경비일지라도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잡는다는 식으로 세계인 전체가 불안할 것은 너무나 뻔한 통박이다. 그런데도 이 방법밖에 없을까?

아니, 이 모든 쟁점을 다 제쳐두고 인간적인 본능으로 우선 약자에게 동정심이 간다. 그 원인이야 무엇이든 당장 저 폭격 아래에서 죽어가는 산양 한 마리, 깨어지는 바위, 누추한 피난 행렬, 이 모든 현상이 너무 불쌍해 보인다. 그 남루 속에서 싹터 자라날 증오심까지도 불쌍하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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