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역 7개 사회단체 합리화 대책위 결성

몇 년 전의 선배나 몇 년 뒤의 후배나 꼭같이 경주.남해.설악산으로 향하던 수학여행, 체육시간만 끝나면 벗어버리던 노랑이나 파랑 원색의 체육복, 비싼 돈을 주고 갖은 폼을 잡았지만 촌스럽게만 느껴지던 졸업 앨범...

보통 사람이라면 비슷하게 갖고 있을 학창시절의 기억들이다. 20년 전이나 30년 전 쯤이라면 그랬을 만도 한 일. 그러나 그들이 학부모가 돼 자녀들의 학교 생활을 살피다가 '어쩌면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수십 년 묵은 학교 내 이런 관행들이 최근 크게 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분야별로 조금씩 진전돼오던 개선 움직임이 교육.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조직화하면서 올해 교육계 최대의 관심거리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것이다.

◇교육소비재 합리화 대책위 출범=14일 오후 대구 참여연대 사무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의미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전교조 대구지부.참교육학부모회.대구학교운영위원협의회.남부새교육시민모임.강북사랑시민모임.대구참여연대.YMCA 등 7개 단체가 '교육소비재 합리화 대책위'를 결성한 것.

교육소비재란 표현은 다소 낯설지만 학생들이 교육활동 가운데서 돈을 들여야 하는 여러가지를 아우른 것. 교복과 체육복에서부터 졸업 앨범, 수학여행, 교내 매점 등 많은 부분이 포함된다.

대책위는 이같은 부분의 가격결정 구조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학교 경영을 투명하게 하는데 학부모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취지에서 결성됐다.

수십개 단체가 결합하던 종전의 교육 관련 연대기구와 달리 7개 단체만 참가한 것은 실무 중심으로 기동력 있게 대응하기 위한 방편. 대책위는 분야별로 책임자를 정해 체계적이고 현장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필요할 경우 민원 제기, 고충심사 등 법적 대응도 병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예상되는 변화들=대책위의 활동은 당장 다음달부터 시작돼 일년 내내 계속될 전망. 중.고교 신입생들이 학교를 배정받는 2월초부터 교복 구매가 시작된다. 교복은 학부모들의 관심이 커 대구에서는 3년 전부터 가격 합리화를 위한 노력이 싹텄다.

그 결과 20만원 안팎이던 교복 가격이 절반 가까이로 떨어졌고 작년에는 30여개 중.고교가 교복을 공동구매했다. 기존 교복 업자들과 시비가 여전하지만 대책위는 지금까지의 성과를 토대로 공동구매 비율을 전체 중.고교의 5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 이를 위해 이달중 교육청을 방문해 교복 착용 시기에 대해 의논하고 학교별로 공동구매를 추진할 수 있도록 일정을 가급적 빨리 발표해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2월말에는 많은 학교에서 매점 임대 계약이 실시된다. 대부분 학교 매점의 임대 기간이 이때 끝나기 때문에 대책위는 학교운영위원들과 교사,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여론 형성에 주력하기로 했다. 학교 매점의 경우 가격이나 품질 등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 학생들의 수요가 만만찮아 적잖은 수입을 올려왔는데 임대료는 연간 천만원 미만이 대다수였다. 대책위 관계자는 "화원여고, 달성고 등이 작년에 매점을 입찰에 붙인 결과 임대료가 6천여만원까지 올라간 것은 그동안의 매점 임대료가 턱없이 낮았다는 사실을 방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교복과 함께 체육복 공동 구매도 중요하게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 학교의 체육복이 품질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는 불만이 교복 못지 않게 많은 만큼 올 신입생부터 공동구매를 통해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는데 힘을 쏟자는 게 대책위의 복안.

졸업 앨범의 경우 학기초부터 졸업반 학생들의 각종 행사 사진 촬영 등 준비가 시작되므로 3월에 학교별 앨범 비교 전시회를 갖는 등 홍보전이 펼쳐질 예정. 졸업앨범 역시 최근 몇 년 동안 교사와 학부모들의 노력 끝에 여러 학교에서 공개 입찰을 통해 업자가 결정되고 가격 하락, 품질 상승 등 성과가 적잖았던 만큼 전시회를 통해 많은 학부모와 교사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수학여행과 야영비 현실화를 위해 3월중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수학여행비 정보 공개 신청 등을 통해 투명한 결정 구조를 만들어간다는 계획. 이어서 하복 공동구매, 앨범 입찰 우수 사례 전파, 수학여행 우수 사례 발굴 등 10월까지 추진 일정이 빽빽하게 마련됐다.

대책위의 이런 일정이 교사와 학부모, 교육.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활기를 띨 경우 대구의 많은 학교들이 1학기부터 상당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기존 업자들과의 마찰, 학교장과의 이견 등 문제도 적잖겠지만 지금까지의 성과와 대책위의 준비 상황에 비춰볼 때 학교 내 관행 타파, 학교 운영 투명화 등 기대할 부분이 더 커 보인다. 학교매점 분야를 맡은 와룡고 이대식 교사는 "교육소비재 합리화 노력은 학부모와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이끌어가야 할 운동"이라며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고 공교육을 바로 세우는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넘어야 할 장애물=교육소비재 합리화의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현재 여건상 걸림돌이 적잖은 게 사실. 지금까지 결정권을 가졌던 교장, 교감 등 간부들이 학부모나 교사들의 요구에 이견 없이 양보할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교복 공동구매 등에 협조하라는 공문 발송 만으로 역할을 끝냈다는 식의 소극적 자세, 말썽이 있는 학교에 대한 감독 소홀 등 지금까지 교육청이 보여온 태도 역시 교육소비재 합리화에 보이지 않는 장애가 돼왔다는 비판도 많다.

일부 교장들은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진행돼온 사항들을 입찰이나 공개화 등으로 확대할 경우 공연히 학교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면서 "학교 간부들에게 무슨 비리나 있는 것처럼 보는데 쉽게 허용한다면 이를 인정하는 꼴 아니냐"고 했다.

대책위로서는 강경 대응보다 대화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노력도 필요한 것. 그 방안으로 학교운영위원회 활성화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실제 교육소비재들은 대부분 학운위 안건으로 상정,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다.

교복이나 앨범 등에서 이미 많은 학교들이 학운위를 통해 공개 입찰, 공동구매 등을 결정해왔다. 따라서 각급 학교의 학운위를 활성화하면 학교 간부들과의 마찰 없이 자연스럽게 결정 구조를 투명화할 수 있는 것.

그러나 현재 학운위원의 상당수가 교육계 인사들이고 위원으로 참가한 학부모, 교사 역시 학교 간부들과의 관계 때문에 껄끄러운 상황을 가급적 피하려다 보니 안건 상정 자체가 쉽지 않은 현실. 대책위에 학교운영위원협의회가 참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됐다.

대책위 관계자는 "교육소비재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를 합리화하는 노력과 학운위 활성화는 같은 맥락"이라면서 "학교 발전과 학생 복지를 위해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 학운위원들이 진정으로 고민해볼 때"라고 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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