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안동 퀸트리는 '안퀸트리'

전두환 전 대통령이 99년 여름 서부전선을 방문했을 때의 뒷얘기가 그때 정가에서 화제가 됐었다. 장세동씨 등 여전히 충성스런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단 관측소를 찾은 그는 자신이 사단장 재직시 발견한 제3땅굴을 둘러본 뒤 방명록에 멋지게 소감을 적었다고 한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 천하제일 사단을 방문해서 장병들의 씩씩하고…'를 쓰면서 한문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한문으로 썼다. 이어 잠시 머뭇거린 전통(全統)은 '…自身(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니 든든하다'고 마침표를 찍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걸려버렸다.

'自信感'을 '自身감'으로 실수해 버린 것이었다. 이어 장병들과의 대화시간,전통은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요즘말로 엽기적인(?) 설명을 했다. 대북 포용정책은 반드시 '상호주의'에 입각해야 하는데, "그 상호주의는 적이 때리면 우리도 때린다는 것"이라고. 어찌 보면 전통은 그때나 지금이나 신선한'개그'로 웃음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오히려 즐겁다.

사실 이름 남기는데는 우리 고위공직자들이 선수다. 주요 공공시설엔 빠짐없이 당시대통령의 준공휘호나 기념 식수 팻말이 있다. 그게 있어야 준공검사가 나는 모양이다. 휘호를 남발하다 보니 말썽도 생겼다.

통일대불을 관리하는 팔공산 동화사는 지난 95년12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통일기원대전'이란친필현판을 17개월이나 천으로 덮어놓아야 했다. 비자금사건이 터져 노통이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DJ대통령은 꼭 1년전 4월 인천국제공항 개항식에서 기념식수를 하고난 뒤 기념휘호를 써달라는 공항측의 요청을 거절했다.곳곳에서 전직 대통령들의 휘호를 보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었다는 뜻이다.

바꿔치기한 全統나무

말을 바꾸어, 대구시 산격동 경북도청 건물 현관 앞 왼쪽 정원을 보면 3층 높이의 은행나무 한그루가볼품없이 서 있다. 나무아래엔 '전통내외분 기념식수, 87년2월24일'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대통령이 심은 나무다.그런데 사실은 대통령이 심은 나무가 아니다.

전통이 간 다음 비실비실 고사(枯死) 위기에 놓이자 그해 가을 담당 농림국이 똑같은 크기의 은행나무로 깜쪽같이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물론 지사로부터 OK사인도 받았었고.이 한그루의 은행나무에서 우리는 5공(共)이라는 한시대의 허상, 뼈없는 공직자들의 위상(僞像)을 읽는다. "대통령이 심은 나무는 왜 죽으면 안된단 말인가?"

또다른 사례 하나. 울릉도는 3공이후 6공까지 신임 내무장관이나 경북지사 초도순시의 필수코스였다.말이야 민정(民情)을 직접 살핀다는 것이었지만, 까놓고 장관.지사 폼잡는 행사로선 최고였다. 문제는 장관.지사의기념식수였는데, 손바닥만한 군청마당에 오는 장관, 지사마다 심을 공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존에 있는 나무 주위의 흙을 테두르듯 파내고 기념식수인양 한 다음 이름 석자 명패만 계속 바꿔, 오는 원님 기분만 맞췄다는 기막힌 얘기까지 전해진다. '관광특수실패' 책임은 없고…

이제 "'퀸트리'는 왜 죽으면 안되는가?"를 말하자. 99년 4월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던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가인 충효당 앞뜰에 기념식수한 구상나무가 지난해 가을 말라죽자 안동시 공무원들이 같은 나무를 강원도에서 구해와 한밤중에 바꿔치기해 놓았다는 기사가 지난달에 실렸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퀸트리'인가 아닌가?

구상나무는 소나무과의 상록수. 강원도 이북에 분포하는 한대성 고지(高地)수목으로 주목(朱木)만큼귀하고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 선택된 것인데 원래의 '퀸트리'는 수령 30년에 40만~50만원짜리이고 바꿔치기한 '그냥트리'는 수령 17년. 강원도 조경업체가 나무값 30만원만 받고 서비스했다고 힌다.

수종선택이 잘못됐든 관리잘못이든 간에 죽었으면 파내면 그만인 것을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회관리사무소측은 펄펄 뛰었다. 안동시 산림과장과 사회산업국장은 들통난데에 당황, "관광객들이 모두 믿고 명물이 된 판에 국제적 망신거리 아니냐"며 숨겨달라고 통사정했지만 이게 도청의 전(全)트리처럼 숨길 수 있는, 그리고 숨겨야할 거리가 도무지 아니었다.

전트리처럼 죽으면 목 날아갈 사안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곳 공직사회 한쪽에선 "안동을 위해 숨겨주지 않고…"하며 오히려 언론이 원망스럽다는 눈치다.

나무 하나에 웬 장광설이냐고 할지 모르나 우리는 전통나무를 바꿔치기했던 15년전 경북도 공직자들의 눈치보기, 복지안동(伏地眼動)식 행태가 그때나 지금이나 고금동(古今同)임에 혀를 차는 것이다. 여왕이 다녀간 이후 그 절호의 찬스에, '관광특수'제대로 못살린데 대해 책임질 공직자는 한명도 없고 마치 죽은나무 하나에 안동관광의 전부를 건듯이 말하면 안동시민들은 박수를 칠 것인가?

사연이 이런 줄도 모르고 하회마을에 밀려오는전국의 관광객들은 구상나무 아래서 지금도 기념사진을 찍는다. 퀸트리를 기념해서가 아니라 '안 퀸트리'를 기념해서 찍는다면 이 또한 하회의 명물이다.

논설위원 강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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