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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변호사 4만 명 시대, 소액 법정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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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소송이 깔고, 유튜브가 가르치고, 챗GPT가 써준다

두꺼운 소송 서류를 들고 대구지방법원 법정동으로 향하는 나홀로 소송인. 변호사 없이 소장 접수부터 판결까지 수개월의 험난한 과정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두꺼운 소송 서류를 들고 대구지방법원 법정동으로 향하는 나홀로 소송인. 변호사 없이 소장 접수부터 판결까지 수개월의 험난한 과정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2025 사법연감'에 따르면 민사 소액사건 나홀로 소송 비율은 81%에 달한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변호사 없이 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결국 해냈습니다."

지난해 7월, 대구 남구 대명동 빌라 1층에 사는 김진수(35·가명) 씨의 집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윗층 세대의 누수였다. 도배와 장판을 새로 깔아야 했고, 손해는 300만 원으로 불어났다. 윗집 소유자에게 배상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건 묵묵부답이었다.

나홀로 소송이 늘어난 데는 제도적 인프라의 역할도 컸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포털(ecfs.scourt.go.kr)에 접속해 사용자 등록과 로그인을 마치면 소장 제출부터 진행 상황 확인까지 집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다.게티이미지뱅크
나홀로 소송이 늘어난 데는 제도적 인프라의 역할도 컸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포털(ecfs.scourt.go.kr)에 접속해 사용자 등록과 로그인을 마치면 소장 제출부터 진행 상황 확인까지 집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다.게티이미지뱅크

변호사를 찾아갔다. 수임료 550만 원(부가세 포함)에 감정 비용 600만~900만 원, 성공보수 5~10%, 승소 후 강제집행 대행 수수료 50만 원까지. 항목을 더하자 총비용이 돌려받아야 할 300만 원을 훌쩍 넘어섰다. 소송에서 이겨도 남는 게 없는 구조였다.

김 씨는 혼자 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포털을 켰다.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막히면 챗GPT에 물었다. 그렇게 소장을 직접 완성했다. 혹시 모를 오류가 걱정돼 변호사 상담을 통해 감수만 받았다.

전자소송으로 지급명령을 신청하면서 절차가 시작됐다. 채무자 주소보정 명령이 떨어졌고, 청구취지 변경도 했다. 윗집 소유자가 이의신청을 내자 사건은 정식 소송으로 넘어갔다. 두 달 뒤 첫 변론기일이 잡혔다. 피고가 답변서를 내자 김 씨는 준비서면으로 항변을 하나씩 반박했다. 변론기일 당일, 판사 앞에 홀로 선 그는 준비서면의 사실 여부를 직접 진술했다. 이후 법원은 피고가 원고 김 씨에게 손해배상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

여섯 달에 걸친 싸움이었다. 법률 용어 하나 이해하는 것도, 소장 한 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해냈다. 김 씨의 경험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변호사 없이 홀로 법정에 서는 '나홀로 소송'이 한국 민사 법정의 일상이 됐다.

변론기일을 앞둔 대구지방법원 법정 내부. 판사석과 원고·피고석, 방청석이 모두 비어 있다. 곧 이 자리를 채울 소액사건 당사자 대부분은 변호사 없이 홀로 법정에 선다. 변호사는 넘쳐나지만 소액 법정엔 아무도 없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변론기일을 앞둔 대구지방법원 법정 내부. 판사석과 원고·피고석, 방청석이 모두 비어 있다. 곧 이 자리를 채울 소액사건 당사자 대부분은 변호사 없이 홀로 법정에 선다. 변호사는 넘쳐나지만 소액 법정엔 아무도 없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나홀로 소송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순하다. 돈이다.

수성구 범어동 법조타운의 수임료는 통상 550만 원(부가세 포함) 선이다. 같은 사건을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에 문의하면 착수금만 700만~800만 원을 부른다. 여기에 성공보수 10%가 붙는다. 대여금 200만 원을 돌려받으려고 변호사를 선임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다. 변호사 기본 상담료도 30분에 10만 원, 이후 10분 초과마다 5만 원이 추가된다. 소액 분쟁 당사자들에게 변호사는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다.

변호사는 넘쳐난다. 2025년 기준 등록 변호사 수는 4만 397명이다. 로스쿨이 도입된 2009년 1만 1,016명이던 변호사가 16년 만에 4배 가까이 늘었다. 매년 1,700명 안팎의 신규 변호사가 배출되면서 법조계 내부에서는 '포화 상태'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공급은 넘치는데 소액 민사사건 당사자에게 그 조력은 닿지 않는다.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시민이 민사소액소송 상담을 받고 있다. 수임료 안내판에 표시된 착수금만 550만 원. 소액 분쟁 당사자 상당수는 이 벽을 넘지 못하고 나홀로 소송을 택한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시민이 민사소액소송 상담을 받고 있다. 수임료 안내판에 표시된 착수금만 550만 원. 소액 분쟁 당사자 상당수는 이 벽을 넘지 못하고 나홀로 소송을 택한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 나홀로 소송을 키운 법원 포털·유튜브·AI

나홀로 소송이 늘어난 데는 제도적 인프라의 역할도 컸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포털(ecfs.scourt.go.kr)에 접속해 사용자 등록과 로그인을 마치면 소장 제출부터 진행 상황 확인까지 집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다. 포털은 메인화면부터 나홀로 소송인을 겨냥한 구성이다.

소장·이의신청서·답변서·준비서면·항소장·소 취하서 등 각종 서류 작성법을 단계별로 안내하고, '나홀로 소송' 전용 탭까지 별도로 운영한다. 대여금·약정금 등 소송 유형별 예시 서식도 내려받을 수 있다. 법률구조공단 홈페이지에서는 소장과 신청서 양식을 받아 인적사항과 청구취지만 바꿔 넣으면 기본 서류가 완성된다.

온라인도 나홀로 소송의 든든한 길잡이가 됐다. 주요 포털 법률 카페와 유튜브 채널에는 '나홀로 소송 완전 정복', '소장 작성 5단계' 같은 콘텐츠가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쌓여 있다. 변호사를 찾지 않아도 소송의 기초를 익히는 데 어렵지 않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홈페이지 메인화면.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홈페이지 메인화면. '나홀로 소송'에 대한 소송방법과 절차, 소송서류 작성 방법 등을 안내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AI가 소장을 써드립니다

나홀로 소송의 풍경을 바꾸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생성형 AI다.

경산에 사는 40대 직장인 박성진 씨는 1,500만 원 규모의 대여금반환청구소송을 준비하면서 변호사 대신 챗GPT를 먼저 켰다. 법률 문서의 형식과 용어를 입력하자 상당히 정교한 소장 초안이 나왔다.

박 씨는 이 초안을 들고 변호사를 찾아가 30분 검토 상담만 받은 뒤 법원에 서류를 냈다. 준비서면도 같은 방식으로 작성했다. 수임료 한 푼 없이, AI와 단기 상담만으로 소송 전 과정을 버텨낸 것이다.

온라인에서 소송 정보를 충분히 익힌 뒤 변호사를 찾아와 핵심만 확인하고 선임은 하지 않는 의뢰인도 늘고 있다. 정보는 온라인에서 무료로 얻고, 변호사는 최소한의 검증 창구로만 활용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 3월 30일
대법원은 지난 3월 30일 'AI 활용 허위 법령 등 인용 대응방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AI(인공지능)의 환각 현상으로 인한 허위 법령·판례 인용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허위 인용으로 소송 지연이나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을 당사자에게 부담시키는 방안 등을 담았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box기사

◆AI가 만든 가짜 판례… 법정 안으로 파고든 환각의 역습

챗GPT로 준비서면을 작성하던 나홀로 소송인 박모 씨는 지난해 특정 대법원 판결을 인용했다가 낭패를 봤다. 상대방 변호사가 "그런 판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AI가 만들어낸 가짜 판례번호였다. 재판은 불필요하게 한 기일을 더 소비했다. 'AI 환각(hallucination)'이 법정 안으로 파고든 사례다.

전문 법조인들에게 AI는 이미 필수 도구다. 엘박스·슈퍼로이어·챗GPT가 판례 검색부터 초안 작성까지 책상 위에 자리 잡았다. 문제는 법률 지식 없이 AI를 맹신한 채 소송에 뛰어드는 일반인들이다.

법률사무소 더 봄 엄요한 변호사는 "AI가 작성한 서면에는 존재하지 않는 판례, 법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주장이 섞여 있다. 당사자는 맞는 줄 알고 제출하지만 오히려 재판에서 불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고 했다.

그는 또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AI는 실제 판례의 문구를 교묘히 비틀어 원칙과 예외를 혼동한 법리를 제시하기도 하므로, AI를 활용하더라도 법률전문가인 변호사의 적절한 검토와 조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소송 당사자와 대리인의 AI 활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위 법령·판례 인용을 방지하기 위해 사법정보공개포털에
대법원은 소송 당사자와 대리인의 AI 활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위 법령·판례 인용을 방지하기 위해 사법정보공개포털에 '허위 사건번호 확인' 기능을 지난 2월에 도입했다. 사진은 이용자가 사건번호를 입력해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해당 서비스 화면.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대법원, 처음으로 제재 칼 빼들다

대법원은 지난달 30일 'AI 활용 허위 주장·증거 제출 대응 TF' 결과를 발표했다. '각급 법원에서 허위 법령·판례 인용 사례가 다수 보고됐다'는 공식 확인과 함께, 구체적 제재 방안을 처음으로 내놨다.

즉시 적용 가능한 제재는 세 가지다. ▷허위 법령·판례 인용으로 재판을 지연시킨 당사자에게 소송비용을 부담시킬 수 있다. ▷허위 서면의 진술을 변론에서 제한하고 판결서에 허위임을 적시할 수 있다. ▷검증 없이 허위 내용을 제출한 변호사는 변협에 징계를 의뢰할 수 있다. 다만 시행 여부는 개별 재판부의 재량이다.

입법 차원에서는 AI 활용 사실 고지 의무화와 허위 인용 시 과태료 부과를 담은 소송법 개정안도 제안했다. 이미 일부 조치는 가동 중이다.

또 사법정보공개포털(portal.scourt.go.kr)에는 지난 2월 20일부터 '허위 사건번호 확인' 기능이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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