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하얀 어둠을 잘라내고 맑은 유리구슬을 끼웠어

사랑했던 일들도

미워했던 일들도

모두 벗어버리기로 했어

그러자

세상은 모두 무지개를 걸어두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어

하룻밤의 환상이었던가

날이 밝자

삶의 흔적들이 얼룩진 채 모습을 드러내고

너무나 선명한 먼지들

주름진 모습들에

나는 다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어

눈 감아버리고 싶을 때가 더 많아졌어

점점 세상이 두려워졌어

백내장을 앓는 날보다

더욱더 무기력해지는 나날이었어

아!

아름다운 시절이여

그리운 나의 백내장이여

-전성미 '백내장'

▧백내장을 잘라버리고나면 세상이 모두 무지개를 걸어둔 것처럼 아름답게 빛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그 기대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이 시는 성립한다. 전복적 상상력! 맑은 두 눈으로 보기에 이 세상 삶의 흔적은 얼룩이 너무 많다. 먼지조차도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인다. 맑고 깨끗한 눈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역설이고, 인생은 이 역설 위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이 시는 주장하고 있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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