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7년 문경 가은중학교 초임 시절, 발령 두 달여 만에 소풍을 갔다.
학교에서 25리나 떨어진 봉암사에 가게 됐는데, 학년당 여덟 학급에, 학급당 70여명을 웃돌았으니 1천700명이 넘는 대부대였다.
두 줄로 세우니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두시간 반이나 걸어 봉암사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시간. 아이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고 반별 노래자랑을 하다 계곡물에 발도 씻고, 세수하고, 사진도 찍고 하다 오후 3시쯤 출발하여 돌아오면 5시가 훨씬 넘었다.
스물일곱살 담임과 열여섯살 중3생들이 섞여 놀 때는, 교복만 아니라면 서로 구별도 잘 되지 않았다.
씨름도, 보물찾기도 함께 했고, 나뭇가지에 오르기도 서로 다투었다.
세월이 26년이나 흐른 2003년. 여고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지금, 다시 소풍철이 왔다.
농촌학생들은 대도시의 번쩍이는 놀이공원을 선호한다.
장소는 대구의 우방랜드로 결정됐다.
드디어 소풍날. 교복차림으로 가야한다고 윽박지른 끝에 일단 모두들 교복차림으로 버스에 올랐다.
사복을 허용하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200리도 넘는 길을 1시간 반만에 달려 우방랜드에 도착했다.
앨범사진을 촬영해야 한다며 계속 교복차림을 주문했지만 이것저것 놀이기구를 타는 학생들은 어느새 다 사복으로 갈아입었고 더러는 화장까지 한 얼굴들이다.
연예인 뺨칠만한 과감한 차림새에 선생의 얼굴이 화끈할 지경이다.
일순 당황했지만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이 아이들을 다 뜯어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중 한 학생은 정말 화장이 두꺼웠다.
까만 피부에 새하얀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볼연지에 립스틱까지 빨갛게 칠해서 덕지덕지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보기 싫지가 않았다.
제법 세련된 화장술의 아이가 애늙은이처럼 생동감이 없어보이는데 비해 서툴러서 오히려 더 예뻐보였다.
소풍 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사진을 갖다주는 학생이 두 명밖에 없다.
함께 사진을 찍은 아이들이 수십 명인데, 모두 자기 사진만 현상한다.
그냥 자기 사진에 선생을 배경으로 넣었을 뿐이다.
이게 요즘 아이들이고, 신세대의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우리 교사들은 신세대와 가장 먼저 호흡하는 구세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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