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그대 가슴에는

두레박 줄을 아무리 풀어내려도

닿을 수 없는 미세한 슬픔이

시커먼 이무기처럼 묵어서 사는

밑바닥이 있다.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안 보이는 하늘이 후두둑 빗방울로 떨어지며

덫에 걸린 듯 퍼덕였다.

노향림 '깊은 우물' 중

깊이 묵은 슬픔을 특이한 뉘앙스로 빚고 있다.

이무기가 사는 밑바닥이 아니라 '이무기처럼 묵어서 사는 밑바닥'의 표현은 죽은 물질 바닥을 고생대 이래 살아온 슬픔의 유기체로 숨쉬게 한다.

구름이 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빗방울 같은 것이 되어 늪에 걸려 퍼득인다'는 언어 구성도 마찬가지다.

숙명적 얽힘의 미묘한 깊이를 노향림식 스타일로 조립하고 있다.

권기호 (시인.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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