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에서 원주민의 삶과 그곳의 풍경을 중후한 색채와 선명한 색조로 그렸던 폴 고갱(1848~1903). 그는 프랑스 후기 인상파의 대표 화가로 야수파와 피카소 미술의 모태가 됐다.
반 고흐의 친구이기도 한 고갱은 마흔세살 때인 1891년 타히티로 건너가 원시의 순수와 아름다움을 묘사하며 문명을 비판한다.
대표작 '타히티의 여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현지 여인의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
8일은 고갱이 파란많은 생애를 마감한 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길아트는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평전 '고갱, 타히티의 관능'(전2권)을 펴냈다.
데이비드 스위트먼이 쓰고 한기찬 시인이 옮긴 이 책은 고갱의 삶을 풍부한 도판과 함께 조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 중 재미있는 부분은 그가 타히티에서 얻은 후손의 삶이다.
고갱의 타히티 체류를 두고 그가 심정적 식민주의자이자 섹스관광자였다고 일부에서는 비판하지만 어찌됐든 그는 프랑스 보호령인 이곳에 머물며 자식을 낳았다.
고갱의 친아들로 어느날 갑자기 국제적 명성을 얻은 타히티 화가는 1980년 1월1일 세상을 떠난 에밀 마라에 아 타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해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고, 그림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어머니를 위해 고기를 잡기도 했고, 생전의 아버지처럼 술과 싸움을 좋아했다.
그가 술값을 버는 방법은 관광객들 앞에서 포즈를 잡는 것. 관광객들은 고갱의 아들과 사진을 찍은 뒤 푼돈을 던져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타히티의 거지이자 뜨내기였던 에밀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나타났다.
미국인 사업가의 아내인 프랑스 여성 조제트 지로는 에밀에게 당시의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타히티 마을의 오두막에 작업실을 차리고 물감, 붓, 캔버스를 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몰랐던 에밀은 후원자가 가져다준 아버지의 작품 사본을 보고 그림을 그렸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대로 두고볼 만했다.
서명을 할 때는 어엿하게 '고갱'이라고 썼다.
2년 뒤 지로 부인은 에밀의 그림을 영국 런던으로 가져가 첫 개인전을 열어줬으나 그의 이름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에밀은 아버지의 명성에 힘입어 한때 대중의 주목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지로 부인은 루마니아인인 마조리 코블러에게 거액을 받고 에밀을 넘겼고, 이런 거래를 눈치채지 못한 에밀은 이후 시카고의 한 건물 지하에서그림을 그렸다.
또 코블러가 고용한 조각가의 지도를 받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결국 이용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에밀은 한 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모험에 대해 "나는 화가로서 형편이 없었다.
애는 썼지만 모든 게 엉망이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부전자전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는 실토인 셈이다.
그는 많은 자식을 남겼지만 그중 예술적 재능을 보이는 후예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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