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에 밴드가 가설되고 드문드문 자리잡는 할머니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부엌에서 음식을 차려 내느라 여인네들이 분주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조금 늦다 싶게 도착한 여교사 두 명은 그 즉시 좌중으로 섞여 들더니 금방 할머니들의 친구가 됐다.
쑥스러움 많을 나이의 어느 처녀도 손녀같이 자리를 옮겨 다녔다.
한 간부 여성 공무원은 큰 키를 굽혀가며 이 할머니 저 할머니의 마음 문을 트게 하느라 바빴다.
진작부터 시작된 '주부 가수'들의 노래로 잔치 분위기는 서서히 달궈지고 있었다.
선생님인 엄마를 따라 장구까지 준비해 온 초교생 아들이 장단을 쳐올리는 모습을 보려고 할머니들이 몸을 기울이고 목을 길게 뺐다.
중학생 아들이 '소양강 처녀'를 연주곡으로 택하자 그 엄마가 장구로 장단을 살려줬다.
나이 어리고 악기가 플루트였지만 할머니들에게 그 곡이 좋을 듯싶었던 모양이었다.
최소한 지엄하신 척이라도 해야 격에 맞을 50대의 한 비구스님이 '불효자는 웁니다'를 청승스레 불러 할머니들의 마음 깊은 곳을 휘젓기 시작했다.
"유행가도 스님이 부르면 염불"이라는 억지 주장을 해대며 이어간 한맺힌 가요 메들리가 할머니들을 움직였다.
이러기를 30여분.
양로원 할머니들은 그제서야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표정 없고 굳었던 얼굴들이 풀어지고 있었다.
평균 나이 85세. 연로한 할머니들이 슬몃슬몃 춤판으로 어우러들었다.
한 할머니는 어느 젊은 봉사자에 마지못한 듯 이끌려 플로어에 나와서는 슬그머니 손을 빼더니 깜짝 춤꾼으로 변신하고 말았다.
박수로 장단이나 맞추던 한 할머니가 어느덧 흥에 사로잡혀 스스로 나서서 한 여성 간부 공무원을 춤추자고 이끌었다.
79세의 한 할머니는 춤 솜씨가 좋다는 칭송을 듣기에 이르렀다.
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것에 욕심 내는 할머니는 없었다.
춤추고 이야기 나누는데 열심이었다.
76세의 한 할머니는 "숨차고 힘들지만 어울려 노니 정말 즐겁다"고 했다.
한 할머니는 "노인이 땀 흘릴 일이 어디 자주 있느냐"며 땀 닦기를 즐기고 있었다.
한 할머니는 아예 바닥에 퍼질러 앉아 한섞어 노래 불렀다.
이를 지켜보던 비구스님은 "눈물이 나 참느라 애 먹었다"고 했다.
그리웠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정이었던 것이다.
53명의 할머니들이 산다는 화성 양로원(대구시 수성구 상동)에 지난 24일 오후 모여든 사람은 30명이 넘었다.
그러나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잔치 얘기를 제각각 전해 듣고는 각자 부담할 수 있는 만큼씩의 뭔가를 챙겨 모였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단술을 준비했고 어떤 사람은 과일을 맡았다.
어떤 사람은 떡을 책임졌고, 어느 군청 계장(담당)은 사회를 맡기로 하면서 돼지고기까지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비구 스님은 유과를 몇 상자 챙겨 왔고 어떤 사람은 봉투로 힘을 보탰으며, 적잖은 아주머니들은 처음부터 아예 부엌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반 가량의 잔치가 끝나고 돌아 나오던 길. 뒷마무리를 하려는 듯 남녀 고교생들이 나무 계단을 닦고 있었다.
매주 화.목요일엔 고교생이나 아주머니들 10여명씩이 모임을 만들어 할머니들을 목욕시키러 온다고 했다.
어느 제통의원에서는 정기적으로 통증치료를 해 준다고 했다.
어느 여성모임은 풍물 놀이나 수지침으로 할머니들을 기다리게 한다고 했다.
어떤 단체는 두 달에 한번씩 할머니들 점심을 챙겨 온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 한 세상을 꾸며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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