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8시쯤 일용직 근로자 오모(43)씨가 술을 먹고 동료에게 주먹을 휘두른 혐의로 대구 모 경찰서에 잡혀왔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파출소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검거된 것. 오씨는 '폭력행위등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입건돼 전과자로 등재됐다.
같은 날 오후 6시쯤 김모(32.여)씨는 외출하기 위해 대문을 나섰다가 한 경찰로부터 신분증 제시를 요구당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묵묵부답. 10분여쯤 대로변에서 죄인취급을 당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기소중지자 일제단속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화가 난 김씨가 관할 파출소에 따지고 나서야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실적 챙기기 위주의 소신 없는 경찰행정이 전과자를 양산하고, 시민들을 예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
훈방조치.구류 등 대체수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민 반발.민원 등을 피하기 위해 불구속 입건을 남발하거나, 파출소.경찰서 내외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마구잡이식 심문을 조장한다는 공감대가 경찰 내부에서도 팽배해 있을 정도다.
15년 강력계 경력의 한 경찰의 토로. "하루 평균 파출소에서 각 경찰서로 넘어오는 사건 8~10건중 90% 가량이 사소한 시비나 음주로 인한 단순폭력입니다.
불구속 상태라도 입건되면 꼼짝없이 전과자가 됩니다.
이 정도 사건에 왜 굳이 입건까지 해야 하느냐고 보고서를 들고온 파출소 직원에게 물어도 '실적 때문에…'라며 말을 흐릴땐 정말 답답하지요".
불구속 입건이 남발되는 것과 관련해 형사계 한 직원은 '경찰의 소신 부재'를 첫번째 원인으로 꼽았다.
경미한 사건의 경우 훈방으로 유도하거나 당사자들이 진정을 찾은 후에 다시 조사하면 입건 가능성이 훨씬 줄어들지만 피해자가 강경하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는 것.
"사건 다음날 조서를 꾸미면 음주로 인한 폭력사건의 70~80% 가량이 화해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임의로 훈방했다가 '돈 받고 봐준 것 아니냐'는 글이 인터넷에라도 뜨면 문책 당하기 십상이죠. 이런 분위기에서 굳이 복잡한 즉심 절차를 거쳐 가해자를 경범죄로 처리하는 경찰이 있겠습니까?"
또한 일단 상해가 발생하면 아무리 경미한 사건이더라도 피해자의 합의 없이는 입건이 불가피한 형법 규정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우 검거가 원칙인 관행도 잘못이라고 했다.
'실적' 평가도 부담. 파출소.경찰서 별로 매월 한달 검거 건수를 결산하는데 이것이 경쟁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 한 경찰관은 "경찰이지만 영업실적을 우선으로 따지는 외판원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며 "경찰 실적이 늘수록 전과자도 늘어난다는 자조적인 불만까지 생길 정도"라고 했다.
이 같은 실적 위주의 검거 관행은 오는 8월 광역파출소 설치 이후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광역파출소가 설치되면 각 경찰서마다 3, 4개 구역으로 나눈뒤 해당 구역 파출소 직원들이 방범.순찰업무를 공동으로 담당하게 된다.
부족한 경찰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이지만, 결국 실적에 매달리다 보면 단순폭력 사건의 검거 수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찰의 실적 매달리기는 기소중지자 검거에서도 드러난다.
'기소중지자 사범별 검거 배점표'에 따라 점수를 매기기 때문. 지명통보자.향군법 위반은 1점, 폭행.협박.부정수표단속법위반 등은 2점, 사기.횡령.배임과 절도.상해.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은 3점, 강도살인은 최고점인 8점으로 분류된다.
한 경찰관은 "실적이 저조한 형사는 기소중지자를 많이 검거한 동료에게 '한명 달라(검거 보고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달라는 뜻)'고 부탁을 하거나, 다른 시.도로 기소중지자 검거를 위해 '원정'까지 나서기도 한다"고 했다.
점수에 따라 등수를 매기고, 일정 점수에 미달하면 '특별교양'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
그는 "기소중지자 일제단속이 범죄를 예방한다는 실익은 있지만, 이 과정에서 애꿎은 시민들의 피해가 있을 수 있다"며 "결국 평소 외근 활동을 강화하도록 경찰 지휘부 차원에서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대구경찰청 관계자는 "실적에 구애받지 말라는 지침을 여러 차례 경찰서와 파출소에 시달했다"며 "실적을 매겨 검거율을 부추기는 현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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