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묻혀있던 우리역사 이젠 햇빛속으로

흔히 삼국시대라 일컫는 데에서 느껴지듯이 거기에서 배제된 가야사는 오래도록 한국사의 주류로 자리잡지 못하였다.

게다가 일제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덧씌워짐으로써 가야사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는 오직 그런 인식을 벗어나려는 데 치중한 나머지 가야사의 진면목을 제대로 밝혀내어 한국사 속에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은 미흡하였다.

사실 가야사를 복원하려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 단초를 연 것은 77년 고령 지산동 44, 45분의 발굴이었다.

1인의 주인공을 위하여 수십 명이 강제로 죽임을 당하여 매장된 순장묘라는 특이한 내부구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비록 도굴을 당한 상태이지만 출토된 유물의 수준 등은 가야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주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야 제국의 중심은 줄곧 김해의 금관가야였다는 인식이 팽배하여 고령의 대가야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그 실상이었다.

그런 의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게 된 데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이 금관가야의 후예라는 점,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의 주된 대상지가 김해였다는 사실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금관가야는 여러 가야 세력이 성장하던 초기에 잠깐동안 유력하였을 따름이며 실제로는 가야 가운데 장기간 정치적 문화적으로 가장 우위에 있었던 것은 대가야였다.

그 점은 거대한 외형을 가진 고총 고분의 규모나 분포 수 및 여타 문헌 자료를 통하여 명백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대가야는 5세기 후반 무렵 이후 다른 여러 가야 세력을 압도할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하여 마침내 백제나 신라와 어깨를 견줄 만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 점은 바로 국명을 대가야라 칭하였던 데서도 유추되는 사실이다.

이처럼 가야의 역사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재구성될 때 비로소 한국사 속에서 제자리를 잡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본 특집은 그런 측면에서 가야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을 잘 반영하는 참신한 접근이라 기대하여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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