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협상통역 원일한 박사 회고-"국가 아닌 군대간 협정"

"중립국감독위원회나 군사정전위원회 역할을 규정한 정전협정 조항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점이 안타깝습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첫 정전협상에서 53년 7월 협정서명 직전까지 유엔군 협상단의 수석통역장교로 활동한 원일한(86·미국명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연세대 이사)박사의 회고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뒤 전역해 46년 서울로 돌아와 연희대 교수로 일하던 원 박사는 6·25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8월 도쿄로 건너가 미 해군 대위로 다시 현역에 복귀했다.

군인신분이던 그가 51년 7월 정전 회담에 참여하게 된 것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미 육군 중위였던 동생 디크가 정전회담 요원으로 명령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형제가 동시에 통역 장교로 활동하게 됐다.

원 박사는 "첫 회의부터 공산측은 '38선 회복', '외국군 철수', '포로 전원 교환' 등 결론부터 주장하는 바람에 의제를 정하는 데만 무려 18일이 걸렸다"면서 "유엔군 내부에서는 회담이 '짝짝짝' 해서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런 상황을 보고 '그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체면을 중시한 채 타협을 모르는 북측의 자세 때문에 애를 먹었다면서 "북한측은 고집을 부리다 막판에 양보하면 양보했지 타협한 것은 거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정전협정에 한국군 대표의 서명이 없는 것과 관련,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의 협정이며, 국가가 아닌 군대 간의 협정이었다"면서 "김일성도 대통령이 아니라 인민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서명한 것"이라면서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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