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대가야(10)-토기의 전파

남동쪽으로 오동도와 돌산대교를 끌어안은 남해가 내려다보였다.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와 시내로 이어지는 길도 한 눈에 들어왔다.

바닷길과 육로를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천혜의 요지였다.

전남 여수시 둔덕동 고락산. 둔덕아파트 뒤편으로 20분쯤 오르니 해발 200m의 봉우리를 둘러싼 산성과 그 위쪽 정상(335m)을 감싼 보루가 버티고 있었다.

500년대 후반 백제가 쌓은 성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곳에서 대가야(고령) 양식 토기가 조각을 포함해 20여점이나 쏟아졌다.

물론 백제계 토기가 가장 많았고, 토착계와 소가야(경남 고성)계 토기 조각도 일부 출토됐다.

한창 발굴작업을 벌이던 이동희 순천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지역은 400년대 말 또는 500년대 전반 무렵 대가야의 정치·문화적 영향력이 미치다 대가야 멸망시점을 전후해 백제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령세력은 어디를 통해 멀리 여수까지 진출했을까. 400년대 경남 합천의 야로 철산지를 확보한 대가야는 여세를 몰아 거창, 함양을 거친 뒤 백두대간을 넘어 전북 남원, 장수세력과 교류했다.

해양진출에 대한 열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섬진강을 따라 전남 구례, 경남 하동을 통해 바닷길을 뚫었다.

하동을 지나 남해 뱃길로 여수에 닿았던 것. 이후 500년대 들어서는 백두대간을 넘지 않고도 합천-거창-함양-산청-진주-하동-여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령세력은 또 백두대간의 높은 고개, 육십령을 넘어 장수를 통해 금강 상류 유역인 진안까지 진출했다.

전북 진안군 용담면 용담댐. 전북과 충남 금산의 경계를 이루는 봉화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에 자리잡고 있었다.

댐 동쪽 구릉의 황산리 고분군을 통해 1천500여년 전, 대가야와 백제의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지역은 남강과 황강 유역으로 통하는 동서방향의 교통로와 섬진강 유역과 직접 연결하는 남북방향 교통로가 갈라지는 분기점. 그만큼 대가야와 백제간 문화적 완충지이자, 치열한 격전지였을 터. 이는 황산리 고분군 서쪽('나'지구)에서는 모두 대가야(양식) 토기만 출토됐고, 동쪽('가'지구)에서는 대가야, 백제, 신라계 토기가 뒤섞여 나온 점에서도 유추할 수 있었다.

400년대 후반, 대가야의 세력권에 일시 속했다 400년대 말 또는 500년대 전반 백제의 영향권으로 넘어간 지역이었다.

곽장근 군산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진안은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는 혼란상을 틈타 대가야가 진출했던 지역"이라고 말했다.

고령세력은 이처럼 교류나 세력확장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대가야 토기를 뿌려놓았다.

낙동강 연안과 백두대간 서쪽 일부, 하동·여수·고성 등 남해안 일부 지역까지 토기의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전북 임실과 전남 순천 등지는 대가야 토기가 일부 출토됐지만 향후 광범위한 추가 발굴을 통해 토착세력과 대가야, 백제와의 상호관계를 규명해야할 주요 지역이다.

당시 토기의 전파는 문화교류와 함께 정치적 관계의 산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고령읍에서 회천을 따라 남동쪽으로 4㎞쯤 떨어진 외리와 내곡리 중간 야트막한 산기슭. 토기 조각들이 나뒹굴었다.

주변에는 점토와 땔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고 가마의 흔적도 나왔다.

지표조사에서 목긴 항아리(長頸壺), 목짧은 항아리(短頸壺), 사발모양 그릇받침(鉢形器臺), 원통모양 그릇받침(筒形器臺), 굽다리 접시(高杯), 적갈색 연질 납작한 뚜껑접시(蓋杯) 조각 등이 나온 곳이다.

대가야식 토기는 바로 이곳, '내곡동 토기요지'에서 탄생했다.

300년대 전반, 국읍(도읍)을 회천 연안에서 주산 동쪽 고령읍 연조리로 옮긴 가라국은 뚜껑없는 목긴 항아리와 굽다리 접시, 사발모양 그릇받침 등 자기만의 독특한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300년대 말~400년대 초의 고령 쾌빈리 1호 나무널무덤에서는 이처럼 대가야의 특성을 담은 토기가 23점 출토됐다.

대가야 토기양식이 정립되던 시기였다.

400년대 전반의 지산동 32~35호 무덤에서 나온 목긴 항아리는 사발모양 그릇받침에 얹혀 조화를 이뤘고, 굽다리 접시도 더욱 세련되고 뚜껑이 덮여 있었다.

사발모양 그릇받침-뚜껑없는 목긴 항아리-뚜껑있는 목긴 항아리-뚜껑없는 굽다리접시-뚜껑있는 굽다리접시 순으로 대가야식 토기를 완성한 것이다.

이 시기 가라국은 야로의 철산을 개발한 뒤 400년대 중·후반 황강 중류의 합천 반계제로 진출해 이 지역을 세력권에 넣고 원통모양 그릇받침을 전했다.

특히 반계제 고분군에는 토착계 유적이나 유물없이 대가야식 유물만 나온 것으로 미뤄 대가야의 직접 통치가 이뤄졌던 지역으로 보인다.

가라국은 이어 거창 말흘·무릉리와 함양 백천·상백리를 거쳐 백두대간 팔랑치를 넘었다.

황강 상류유역인 말흘리와 무릉리 고분군에서는 일부 발굴과 지표조사를 통해 뚜껑있는 목긴 항아리와 바닥이 평평한 원통모양 그릇받침, 단추모양 꼭지뚜껑 등 대가야 토기 조각이 나왔다.

함양에도 대가야 무덤양식과 토기가 출토됐다.

팔랑치 너머 전북 남원 월산리 고분군에서는 뚜껑있는 목긴 항아리, 사발 및 원통모양 그릇받침 등 대가야 토기가 대다수를 차지했고, 장수 삼고리 고분군의 토기도 백제계 2점 외에 모두 대가야 양식이었다.

400년대 후반 백두대간을 넘어 남원 월산리, 장수 삼고·삼봉리 지배층과 교류하며 토기를 전파했던 것이다.

고령세력은 또 섬진강을 따라 전남 구례와 하동을 통해 바닷가로 나갔고, 마침내 그 바닷길로 중국까지 사신을 보내며 국제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가라국에서 나아가 '대가야'를 안팎으로 천명했던 시점이다.

대가야는 500년대 들면서 서쪽 진안, 임실은 물론 남쪽 산청 중촌리와 의령 유곡·경산리, 진주 수정·옥봉동, 고성 율대리에도 토기를 전했다.

결국 고령을 중심으로 동쪽과 동남쪽으로 경남 의령과 고성, 서쪽과 서북쪽으로 전북 임실과 진안, 서남쪽으로는 전남 여수까지 대가야의 혼을 심었다.

그야말로 가야 대다수 지역을 문화교류권 또는 세력권으로 편입했던 것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전주 여수시 고락산성 발굴 현장. 백제산성인 이곳에서 대가야 양식 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대가야인들은 바닷길을 뚫기 위해 섬진강을 따라 멈추지 않은 교류와 세력을 확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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