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동일 칼럼-사중주권 시대의 언어

국가가 배타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단일주권 시대가 된 것이 근대의 일이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고, 미래 또한 현재와 같지 않을 것이다.

중세는 국가 이상의 단위인 문명권, 국가, 그 아래의 단위인 지방이 독자적인 의의를 가지는 삼중주권시대였다.

근대를 넘어서서 다음 시대로 나아가면서 그 셋에다 세계 전체를 보태 사중주권시대가 되고 있다.

세계.문명권.국가.지방이 사중주권을 이룬다.

사람은 누구나 그 넷에 다 소속된다.

사중주권의 단위마다 의사 전달의 도구이고 문화 창조의 내용인 그 나름대로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네 언어를 다 잘 하는 사람이 다음 시대의 주역이 된다.

네 가지 언어가 각기 어떤 것인가 고찰하면서, 문제가 많은 쪽은 더 길게 다루고자 한다.

세계에 널리 통용되는 언어는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라고 하는 것인데, 직역하면 '프랑스어'이지만, '교통어'라고 하는 것이 예사이다.

유럽 중세 때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남부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을 한 데서 생긴 말이다.

오늘날에는 영어가 교통어로 널리 쓰이고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도 같은 구실을 하기도 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몇 가지 교통어까지 구사해야 멀리까지 나가 마음껏 활동하는 세계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 잘 하자는 것은 망상이다.

국어를 어느 교통어로 대치하자는 것은 아무도 하지 않는 문화적인 자살이다.

우리 한국어는 사용자 수에서 세계의 언어 가운데 12위이다.

남들에게 사용을 강요하지 않고 자기 민족끼리만 써온 언어의 최상위이다.

표준화와 통일이 아주 잘 되어 있고, 문자 해득률이 으뜸이다.

남북 분단후도 그런 장점을 훼손시키지 못한다.

온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모범생이 절망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자기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곳은 전에 영미의 식민지였고 말이 여럿이어서 서로 통하지 않는 경우뿐이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그런 경우인데, 국민의 동질성이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영어 습득 정도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인 탓에 영어를 써오다가, 지금은 표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삼고 영어는 교통어로 쓰려고 배운다.

유럽의 네덜란드나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뛰어나게 잘 하지만, 자기네 말이 국어이고 공용어이다.

동아시아 사람들을 만나서도 영어를 써야 하는가? 한자로 적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말을 영어로 옮기는 먼 길을 택하면 불편하고 의사 전달에 지장이 있다.

나는 세계 여러 곳에서 영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해 연구발표나 강연을 하다가, 일본에서는 한문으로 쓴 요지를 영어로 설명하는 '한문영어현토체'라고 한 것을 만들어내 이용한 적 있다.

중국에 가서 발표하는 논문은 한문으로 썼다.

한문 필담을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의사전달 방법임을 실제로 확인한 경험도 있다.

우리 국어이고 공용어인 표준한국어를 잘 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랜 노력 덕분에 국어교육이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올라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그러나 말하기는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진행되는 공적인 생활에서도 자기 방언을 그대로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혼란을 일으킨다.

방언은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표준 한국어와 방언을 병행시켜야 한다.

지방어를 살려야 하는 세계 전체의 과제가 우리에게도 심각하게 제기되어 있다.

방언을 사용하는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방언으로 이룩한 언어문화의 유산이 이어나가고 재창조하는 데 힘써야 한다.

지방의 민요나 설화를 표준어로 번역해 전승할 수는 없다.

언어를 표준화해야 한다는 이유로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횡포이다.

지방문화를 각급 학교의 교과목으로 삼고 교재를 전문 방언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에서 한 말을 순서를 바꾸어 정리해보자. 자기 고장 방언을 잘 알아 오랜 내력을 자랑하는 문화유산을 적극 이어받고 활용해야 한다.

여러 고장 사람들이 만나는 공공의 영역에서는 표준 한국어를 모범이 되게 구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동아시아의 벗들과는 한문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자. 영어는 물론 다른 교통어 한둘까지 구사하면서 세계를 활동 무대로 삼자. 조동일(서울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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