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름 깊은 가을이다.
그래도 독서의 계절이란 이 가을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면 나는 '홍길동전'을 들겠다.
최근 우리 고전이 꽤나 열심히 소개되지만 아직 '홍길동전'은 제대로 읽히거나 연구되지 못해 그렇다.
게다가 같은 의적 소설인 로빈 후드나 뤼팽은 다시금 화려한 장정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홍길동전'은 도서관에 처박혀 있어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또는 한국인을 대표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디에서든 문서 작성의 보기에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있다.
명패나 명함 상점에도 견본으로 있다.
그러나 역사상 홍길동은 강도였다
따라서 조폭의 입단서라면 모를까 관청의 서류에서도 홍길동이 한국인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것에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홍길동은 이미 역사에서 처단된 강도가 아니라, 우리들 뇌리와 가슴 속 깊이 박힌 정의의 사도이다.
강도를 정의의 사도라고 본다니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으나, 공무원들도 홍길동을 흠모하는 모양이다.
우리의 홍길동에 해당되는 서양의 강도로 로빈 후드가 있다.
영국 관청의 문서 작성 보기에 로빈 후드가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은 없으나, 로빈 후드는 물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주인공과 그들이 활약한 숲인 셔우드라는 이름은 세계 도처에 있고 끝없이 동화, 만화, 영화로 제작되어 왔다.
그러나 그도 강도였다.
그가 실존했는지 의문이나, 강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존했다면 전설 속의 이야기와는 달리 강도로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리라.
같은 별명을 갖는 프랑스 강도로 뤼팽이 있다.
뤼팽은 분명히 실존인물이 아니라, 르블랑이라는 소설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인데, 지금은 뤼팽 3세까지 등장하고 있다.
물론 재미로 만든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존하지 않은 뤼팽을 실존주의의 대가라는 사르트르는 숭배했다.
"그의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 교활한 용기, 프랑스적 지성"에 매혹 당했다고 말했다.
20세기 지성을 대표한다는 사르트르도 그러하니 사람들이 뤼팽을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뤼팽을 만든 탓으로 르블랑은 프랑스에서 '국민작가'로 불린다.
도둑을 창조한 자가 국민작가라니 역시 해괴망측하다.
이밖에도 세계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그런 의적은 있다
그러나 홍길동이든 로빈 후드든 뤼팽이든 누구든 강도인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누구나 강도는 싫어하고 그들이 잡혀 처벌받기를 바란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착한 도둑으로 기억한다.
남의 물건을 빼앗는 점에서 진짜 도둑이지만 그 남이 더러운 정치인이나 경제인인 경우 그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위협하는 도둑을 착한 도둑이라는 의미에서 의적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강도를 정의의 사도로 보는 해괴망측한 생각은 더 이상 도덕적인 판단에 그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의적을 통해 대리로 만족하는 것이다.
민중은 더러운 정치인이나 경제인 등을 스스로 처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적은 그들을 처단한다.
그래서 민중은 박수를 친다.
물론 민중도 현실에서는 권력자에 의해 그들을 죽게 하지만, 그들을 영원히 기억한다.
반대로 우리는 나쁜 정치인이나 경제인을 도둑이라고 부른다.
곧잘 '도둑놈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이 꼴사나울 때 흔히 내뱉는 말이다.
정치나 경제가 더러워도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어리석은 도둑놈, 웃기는 도둑놈이 나타났다.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조폭 영화는 어리석고 웃기는 도둑놈을 주인공으로 한다.
나쁜 도둑놈이 코미디언처럼 어리석고 웃기는 것으로 묘사된 점이 인기를 끌게 한 비결인가? 그러나 도둑놈은 도둑놈이니 그것을 숭배한다거나 영웅시하는 것은 물론 말도 안 된다.
이런 조폭 영화가 등장하기 직전에 신출귀몰하는 탈주범이 대중적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물론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의적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자나 권력자에 대한 존경심이 없고 시기 질투만 해 발전이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착한 부자나 훌륭한 정치가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라고 느낀다.
그만큼 우리 현실은 부조리하기 때문에 의적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 시름 깊은 가을에 다시 홍길동에게 기대는 것일까?
박홍규〈영남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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