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져서 연애 편지를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독해실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어 한마디 한마디를 세 가지 방식으로 읽는다.
그들은 행간을 읽고 여백을 읽는다.
부분의 견지에서 전체를 읽고 전체의 견지에서 부분을 읽는다.
문맥의 애매성에 민감해지고 암시와 함축에 예민해진다.
말의 색깔과 문장의 냄새와 절의 무게를 알아차린다.
심지어 구두점까지 고려에 넣는다〉. '독서술'을 쓴 모티어 아들러 교수의 말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독자의 전범이 될만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는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일과 촌수가 먼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이거나, 주말 연속극 속에서 여자 주인공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예쁜 인형'이거나, 특별한 인간들이 저희들끼리 은밀하게 주고받는 '암호'쯤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간 학교의 시 교육이 주체적인 독자를 길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국어교과서에는 모범적인 정서만 강요하는 시 작품들이 수록되어 왔고,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러한 시들을 시험지의 지문으로 읽으며 감상에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정답을 찾는 데 골몰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문을 나서면서 시의 나라의 주민등록증을 스스로 반납하고 시의 공화국에서 떠나버린 것이겠지요.
시가 모든 사람에게 애틋한 '연애편지'가 되자면, 우선 시라는 것이 특정인의 노리개가 아니라 모든 생활인의 양식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듯이, 공기가 없이는 호흡이 곤란하여 질식에 이르듯이, 두꺼운 옷을 입지 않고는 겨울 들판을 지나갈 수 없듯이, 시가 가진 미덕을 섭취하지 않고는 인간답게 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아침에 과일즙을 마시듯이 시를 즐겨 마셔야 합니다.
'홍대용이 경동 시장에 가서/순대를 썰고 있는 할머니한테/종이 한 장 불쑥 들이밀더니/할머니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글로/한 번 적어 보시지요 한다//홍대용이 구로 공단 가서/작업하다 말고 밖으로 나와 잠시 쉬면서/담배 한 대 피우고 있는 선반공 김씨한테/자기가 쓴 시라며 들이밀고는/한 번 읽어보시지요 한다//할머니 같은 사람만이/좋은 시를 쓸 수 있고/김씨 같은 사람만이/좋은 시를 제대로 알 수 있다며' 이 〈홍대용〉이라는 작품에서 윤동재 시인은, 진정한 생활인이 시의 나라 원주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동국(아동문학가.문성초교장)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트럼프, 중동상황으로 조기 귀국"…한미정상회담 불발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