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21)-세토나이카이를 헤치고

"태풍이 몰려오고 파도가 높아 출항이 불확실합니다".

출발부터 심상찮았다.

부산~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행 쾌속여객선 직원은 출항 시간이 임박해서야 "운항도중 파도가 심하면 되돌아올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괜히 불안했다.

1천500여년 전 왜(倭)와의 교류를 위해 대가야의 목선을 탔던 첫 출항자들의 마음도 이랬을까. 도읍지 고령을 출발해 합천 거창 함양 남원 구례 섬진강 하동을 거쳐 남해로 나왔고, 뱃길을 따라 부산 앞 바다를 거쳐 왜로 향했을 것. 그 바닷길은 앞서 금관가야(경남 김해), 아라가야(경남 함안)가 뚫었고, 대가야의 뒤를 이어 백제와 신라가 또 그 길을 이용했을 터였다.

쾌속선은 '제비호'란 이름만큼이나 날씬했다.

1, 2층을 합해 승객 약 100명은 시퍼런 바닷물이 보이자 이내 눈을 감았다.

여직원의 말은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10분도 채 내달리지 않아 마치 '바이킹'을 탄 기분이 들었다.

왼쪽 오른쪽 차례로 흔들리기 시작한 선체는 파도 속에 파묻힐 기세였다.

비까지 쏟아졌다.

속이 뒤틀렸다.

짐짓 주변을 살폈지만, 모두 조용히 눈을 감은 평안한 상태였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은 '대가야의 왜(倭) 교역루트'를 찾아 떠나는 기자 혼자였다.

'그래, 자그마한 목선에 의지한 채 목숨을 내맡긴 선조들도 있었는데….'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파도는 여전히 거셌다.

눈을 떠보니 빗줄기까지 굵어졌지만 배는 어느새 현해탄을 훌쩍 건너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커다란 섬이 눈에 들어왔다.

승무원은 '부산에서 49.5km 떨어진 쓰시마(對馬島)'라고 알려줬다.

출항한지 1시간 30분쯤 지난 시점이었다.

쓰시마에서 대가야 토기 2점이 출토됐다는 점에서 대가야 해양교역의 주 루트였다는 것을 미뤄 볼 수 있었다.

신라가 낙동강과 동해를 장악한 상태에서 왜와의 교역루트는 사실상 남해를 거쳐 쓰시마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쾌속선은 파도와 빗줄기에 심하게 얻어맞았지만, 다행히 큰 탈 없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부산항을 출발한지 약 3시간만에 도착한 곳은 규슈 북단, 후쿠오카항이었다.

대가야의 교역선이 수십 명의 목숨을 잃고, 수십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건넜을 현해탄을 단 한번만에 무사히 건넜던 것이다.

혼슈(本州) 서쪽 남부와 시코쿠(四國) 북부 사이의 자그마한 섬 지역, 에히메(愛媛)현 오치(越智)군 요시우미(吉海)정. 망루에 올랐다.

뿌연 안개구름 사이를 헤집고 길이 4km에 달하는 큰 다리가 보였다.

시코쿠와 혼슈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구로시마 가이코 오하시(來島海峽大橋)'. 남북으로 이어진 이 다리를 중심으로 동-서로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펼쳐졌고, 크고 작은 배 수십 척이 통과하고 있었다.

다리 양쪽으로 펼쳐진 바다는 섬과 섬 사이를 갈라 치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였다.

일본의 지중해인 셈이다.

시코쿠에 맞닿은 다리 남쪽 해안은 일본 근세 해적의 본거지로 알려졌다.

에히메대학 매장문화재 조사실에 근무하는 미요시 히데미츠(三吉秀充)씨는 "시코쿠와 혼슈를 연결하는 이 다리 주변은 세토나이카이의 중간기지"라며 "해상교통의 요충지여서 대대로 해적이 들끓었던 곳"이라고 말했다.

물류 교통이 활발히 이뤄지던 이 곳에 1천500여년 전 대가야의 배도 함께 있었다.

대가야가 왜와의 교역을 위해 반드시 지나갔어야만 했던 곳이었다.

이를 방증하는 흔적은 세토나이카이 양쪽 해안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세토나이카이가 규슈와 혼슈를 가르는 후쿠오카를 비롯해, 시코쿠와 혼슈를 가르는 에히메, 마쓰야마(松山), 효고(兵庫), 고베(神戶), 오사카(大阪) 지역에 대가야의 토기와 장신구, 말장구가 흩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가야의 교역선은 후쿠오카를 기점으로 에히메를 거쳐 오사카에 이르는 세토나이카이를 주요 루트로 활용했던 것.

대가야 유적과 유물의 흔적은 세토나이카이 양안 외에도 혼슈 북쪽 해안가인 시마네(島根), 후쿠이(福井), 토야마(富山) 등지에도 나타나고 있다.

대가야의 목선이 세토나이카이를 통과해 전했던 유물이 육지의 소국을 거쳐 북쪽으로 흘러들었거나 아니면 후쿠오카에서 혼슈 북부 해안을 타고 직접 유물을 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남쪽으로 후쿠오카와 사가(佐賀), 가고시마(鹿兒島) 서쪽 해안을 거쳐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까지 항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00년대와 500년대, 왜는 나라(奈良) 일대의 야마토 정권과 오사카 일대 가와치 정권을 중심으로 주변 소국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400년대를 전후해 왜 왕권이 야마토 정권에서 가와치 정권으로 바뀌면서 중앙과 지방의 세력관계가 재편됐다.

400년대 후반, 대가야는 세토나이카이를 헤치고 왕권을 지닌 오사카지역 세력과 정치, 문화적 교류를 가지면서 주변 일대에 유물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일본열도에서 지배자의 위용을 나타내는 금 귀걸이 등 금 장신구 대다수가 대가야 양식인 점을 감안할 때 대가야와 왜 왕권과의 긴밀한 정치적 교섭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에히메현 오치군 요시우미쵸의 망루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에히메현 이마바리(今治)시에는 그 옛날 가야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라코다이(唐子台)'란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세토나이카이를 헤치고 대가야의 목선이 정박한 지역이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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