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가 육십령(六十嶺)과 월성치(月城峙), 팔량치(八良峙)와 여원치(女院峙)를 넘은 것은 피의 역사를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400년대로 접어들어 백두대간 서쪽 세력과 교류의 물꼬를 튼 것과 동시에 영토확장을 두고 백제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시발점이 됐다.
이 고개들은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주요 교통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가야는 황강 중류의 길목인 경남 합천군 반계제 일대를 손아귀에 넣고 강줄기를 따라 황강 상류의 경남 거창과 남강 상류의 경남 함양을 거쳐 백두대간을 넘었다.
육십령과 월성치 너머에는 장수, 그리고 팔량치와 여원치 사이에는 아영들과 운봉고원이 펼쳐진 남원이 바라다 보였다
대가야의 활발한 서쪽 진출로 개척은 당시 주변국간 정치적 상황도 한몫 했다.
400년대 초반, 고구려의 힘을 빌어 왜(倭)와 백제에 대항하던 신라는 433년, 나제(羅濟)동맹을 맺어 백제의 위협요소를 줄이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고구려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한동안 혼란에 휩싸였다.
이처럼 신라와 백제가 가야에 눈 돌릴 겨를이 없는 사이, 대가야는 백두대간 너머 남원, 장수, 진안으로 교통로를 확보해 나갔다.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인 전북 장수는 동으로 백두대간, 남서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북으로도 험준한 산줄기가 휘감아 독립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함양에서 육십령을 넘어 맞닿은 장수군 장계면의 '삼봉리 고분군'. 장계면 소재지의 남동쪽에 위치한 백화산(白華山)에서 북쪽으로 장계천(長溪川)까지 뻗어 내린 능선의 꼭대기에 20여기의 무덤이 우뚝 서 있다.
장계분지의 넓은 평야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 99년 전북대박물관의 조사에서 뚜껑 있는 목긴 항아리(有蓋長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뚜껑접시(蓋杯) 등 대가야 양식 토기가 주로 나왔다.
또 지난해 7월 중.대형 무덤 2기에 대한 군산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는 1호 무덤 주인돌널(主石槨)에서 고리자루 큰칼(環頭大刀)이 묻힌 흔적과 껴묻이널(殉葬槨) 2개가 발견됐다.
400년대 후반, 대가야가 백두대간 서쪽에 진출한 궤적이었다.
장수읍 남동쪽의 마봉산(馬峰山)에서 북서쪽으로 읍 소재지까지 뻗어 내린 능선에 40여기의 무덤이 있는 '동촌리 고분군'. 마봉산을 비롯해 말이나 투구와 관련된 지명이 많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충지다.
무덤은 훼손이 심했다.
주민들이 고분 윗부분에 다시 무덤을 쌓고 주변에 벌목을 했는가 하면 고분의 덮개돌이 드러날 정도로 밭을 갈아 놓았다.
그런데도 군산대박물관의 지난 2002년 조사에 이어 지난해 7월 발굴한 3기의 무덤에서는 금 귀고리, 목긴 항아리 등 대가야 유물 수십 점이 출토됐다.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20여기)과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고분군'(30여기)에서도 대가야 양식 유물이 토착계 유물과 함께 나왔다.
금강 상류의 장수지역에는 이처럼 100여기에 달하는 중.대형 무덤이 분포하고, 대가야 유물이 100점 이상 쏟아졌다.
무덤은 산 능선 정상에 쌓아 산봉우리처럼 커보이게 함으로써 지배층 권위의 극대화를 노렸다.
대가야의 전형적인 고분 입지여건을 갖춘 셈이다.
이들 고분군 주변에는 '침곡리 산성'과 '대성리 산성' 등이 자리잡고 있다.
대형 무덤과 대가야 유물, 인접한 산성, 500년대 초반 백제계 토기 등으로 볼 때 장수군에 지역적 기반을 둔 세력은 500년대 초반까지 대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국가단계의 정치체로 추정할 수 있다.
대가야는 장수와 함께 금강 상류 유역에 속한 진안까지 진출했다.
진안군 용담면 용담댐. 댐에서 상류쪽 약 1km 떨어진 용담면 월계리 와정마을의 남쪽 금강에 돌출한 구릉 8부 능선에 '와정토성'이 자리잡고 있다.
수몰지역이면서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은 백두대간을 넘어 남강과 황강 유역으로 통하는 동서방향의 교통로와 금강과 섬진강을 연결하는 남북방향 교통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이다.
백제가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성에는 백제계 토기가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약간의 가야 토기가 포함돼 있다.
와정토성의 서쪽으로 350m 떨어진 '황산리 고분군'은 비록 댐 건설로 수몰됐지만, 수몰 이전의 조사에서 고분군 서쪽에는 대가야 토기가, 동쪽에는 대가야와 백제 양식 토기가 뒤섞여 나왔다.
대가야와 백제가 치열한 영역다툼을 벌였던 요충지였음을 증명하는 곳으로, 400년대 후반 대가야 세력권에 속했다 500년대 전반 백제 영향권으로 넘어간 지역이다.
대가야와 백제가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보이는 또 다른 지역은 황산리 고분에서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월계리 산성'이다.
이 지역은 백두대간 월성치나 육십령으로 연결되는 동서 교통로의 서쪽 출발점으로, 금강 본류의 폭이 200m 이상으로 수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곽장근 군산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산성을 '487년 백제 동성왕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동쪽 가야지역으로 본격 진출하기 위해 공략'(일본서기 기록)한 '대산성(帶山城)'으로 추정했다.
육십령과 월성치 너머 장수와 진안의 남쪽으로는 아영들과 운봉고원을 기반으로 한 남원지역 가야세력의 흔적이 뚜렷하다.
특히 남원 아영면 두락리와 월산리의 경우 50여기의 가야 무덤에서 300년대 후반부터 500년대 중반까지 토착계, 또는 대가야 양식 유물만 쏟아지고, 500년대 중반 이후 신라 토기가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은 백두대간 여원치와 함양 팔량치를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하지만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해 영남권의 생활문화와 더 밀접한 관련성을 띠고 있다.
500년대 초반,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대가야와 서부경남으로 진출하려는 백제가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기문(己汶)'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대가야는 이렇게 팔량치와 육십령을 넘어 남원.장수로 진출했고, 다시 남원의 고지대인 '여원치'와 '지재'를 통과하고 섬진강 줄기를 따라 서남쪽으로 임실과 순창까지 넘봤다.
또 남쪽으로는 전남 곡성과 구례를 거쳐 섬진강 하구를 뚫고 바닷가로 눈길을 돌렸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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