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26)-속리산 종주(4)

4.

뾰쪽하게 높게 솟구친 산봉우리의 용틀임을 하면서 그 위에 눈으로 덮혀 있는 아름다운 속리산 전경에 모두들 도취되었다. 신이 자연스럽게 깍고 다듬은 최고의 예술 작품이었다. "일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눈부신 하얀 설경"이라며 너도 나도 감탄사를 한마디씩 내뱉으며 흥분되어 있었다. 히로뽕 환자보다 더하더라구요. 옆에서 봐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쾌락 아니 환희의 절정을 느끼고 있는 게 느껴져요. 사실 입으로 하는 감탄사는 자연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언어로 내뱉을 수 있는 표현이 없지 않을까. 그냥, 아!, 아!

그래서 누가 속리산은 "말이나 글이나 그림 그 어느 것으로도 형용을 불허하는 절묘와 신비의 영산"이라고 했든가.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한 것은 재작년말 눈 덮힌 지리산과 작년초 덕유산의 운해를 본 이후 거의 일년만이었죠. 신께서 일년에 한번은 인간 이헌태에게 축복을 왕창 주시는 구만. 이헌태도 착한 일 많이 했다는 증거구만. 이헌태, 그게 아니고 산에 가면 그 정도는 볼 수 있어. 알겠습니다. 네.

아들, 이원교도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기가 막힌 산을 보고도 감탄을 한 적이 없는 '무감정 인간'이었는데 이번에는 머리가 굵었는지 연신 "와, 너무 아름답다"라며 너무 너무 좋아한다. 이제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드디어 작동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아버지 따라와야지"하며 탄성을 내지르면서 사색에 젖는 듯하여 또 한명의 '자연 예찬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속리산하면 역시 조선중기 시인 백호(白湖) 임제죠. 어릴 때부터 기방과 술을 찾고 자유분방하게 놀다가 스무살이 넘어서 대곡(大 谷) 성운이란 스승을 찾아서 속리산에 들어가 그곳에서 머물며 공부도 하고 수양도 쌓았다고 하네요.

그가 속리산을 떠나며 시 한 수를 남겼죠.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와 헤어지려 않는데 속세가 산과 헤어지누나". 그래서 속리산의 지명이 나왔구만.

역시 사람도 큰 인물이 되려면 큰 산에서 도를 닦아야 되는구나. 그래야 큰 산을 닮지. 이헌태는 그 대신 큰 산을 다니고 있죠. 백두대간 종주산행이라고 들어보셨나 모르겠네. 대단하죠. 그렇게 해봐야 헛빵이라구요. 알겠습니다. 분명한 사실, 저도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크게 바뀌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선전이 있죠. 백호 임제. 불교 선종가운데 하나인 임제종을 만든 임제도 아닙니다. 신령스러운 흰 호랑이의 백호도 아닙니다. 그럼 뭐야. 조선시대, 당파가 싫어 산천을 떠돌다가 39세로 요절한 호방한 기인이며 양반 신분에도 기생과 승려들과 잘 어울려 시를 쓴 대문장가이며 풍류가입니다.

백호라는 호는 외갓집 앞을 흐르는 섬진강의 지류인 백호를 따서 지었다고 하네요. 현대는 처가쪽 식구들이 판치는 세상인데 이조시대에도 임제는 외가쪽에서 기웃거렸고 더 나아가 자신의 호에까지 갖다 붙였구만. 심하네. 넘어가고.

글재주가 대단했나 봐요. 백사 이항복은 임제의 글재주에 대해 " 뜻이 가는대로 말이 따라가 상상할 수도 없이 물이 샘솟듯 구름이 일어나듯 저절로 일가를 이루니 마치 오색 신기루가 바다 위에 떠서 누각이 저절로 만들어져 자귀냐 도끼를 댈 여지가 없는 것과 같았다". 와, 생각한 대로 주옥 같은 글이 거미 똥구멍에서 실처럼 줄줄 나온 모양이구만. 뭐야.

임제가 학동시절 훈장선생님께서 무지개를 보면서 시를 지으라고 하자 "몇 필의 푸르고 붉은 비단을 직녀의 베틀에서 끊어내어 견우의 옷을 짓고자 비온 뒤 씻어서 하늘에 걸었구나"라는 시를 읊었다고 하네요. 한마디로 조속 (早熟), 뭐야. 고칩니다, 신동(神童)으로.

또 8세 때는 이감사라는 사람과 칠언시를 주고 받을 때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죠. 이감사가 니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냐는 식으로 깔보면서 "탑 아래 어린 소나무가 높으면 얼마나 높으냐./ 탑은 높고 소나무는 짧으니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고 운을 띄우자 이에 백호는 "옆에 있는 분은 소나무가 어리고 짧다고 웃지마오/ 뒷날 소나무가 높이 자리면 반대로 탑이 낮아지리니". 와, 대단해요.

사실 임제는 우리에게는 황진이 묘를 지나면서 제사를 지내고 시를 쓴 분으로 익히 알려져있죠. 나중에 유림에서 그럴 수 있느냐는 비난을 받았지만. "청춘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뒤두고 백골간 무첫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쯤하면 멋과 기백이 넘치는 '풍류남아(風流男兒)'죠. 호가 백호이외에 '휘파람 부는 바보'라는 뜻의 소치 (嘯 痴)라는 이름도 있었다고 해요. 피리를 구성지게 잘 불렀다고 하네요. 바람둥이로 소문도 나 있지요. 이름난 기생은 백호를 연모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하니. 정철을 비롯 허균등 조선시대의 걸물들은 왜 다 바람둥이일까. 바람 피우는 사람들이 옛날 영웅과 대문인들도 그러했다고 핑계를 대는 모양인데. 전에 그랬죠 그런 분이 바람 피우면 풍류남이고 보통사람들이 바람 피우면 잡놈이라고.

외손자 허목이 쓴 백호의 묘비" 공은 자유분방하여 무리에서 초탈한 데다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은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 고 평가했고 임제 스스로도 " 나 는 성질이 거칠고 뻣뻣한 사람이라 어린 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고 자못 호협하게 놀기를 일삼아 기방이며 술집으로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인정을 했더라구요. 뭐 자랑이라고.

백호는 친구 성이현과 작별하면서 "말을 뱉으면 세상이 나보고 미친 사람이란다 / 입 다물면 세상이 나보고 천치란다/ 이렇기에 고개 젓고 떠나가노니/ 어찌 없으랴 아는 이 알아주는 게" 없다고 하소연했죠. 어떤 분도 그랬더라구요. "말하면 잡스럽다 하고 말없으면 어리석다 한다/ 가난하면 못났다 비웃고 부유하면 시기한다 / 세상이 이러하니 살아가기 어렵구나"

노무현대통령의 불만과 비슷하네요. 대통령의 어깨 힘을 확 줄이면 권위가 없다 하고 권위를 또 세우려하면 예전으로 돌아가느냐 하고. 그러니 대통령이란 직이 어렵고 어렵고 또 어렵고 또 어렵고 무한히 어렵다는 것이죠. 뭐니 뭐니해도 역사적 그 시대, 시대의 흐름에 맞추면서도 가장 핵심 포인트는 '국리민복'이 아닐까 싶네요.

이헌태도 억울한 사정은 마찬가지. 말을 많이 하면 "니 혼자 다 떠드냐"고 얘기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니가 조용하니 재미가 없다"고 얘기하고, 나 보고 어찌라는 말이냐구요.

최근 고구려사를 놓고 한국과 중국간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는 마당에 임제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요. 다 이유가 있죠.

임제가 북방지역에 근무하면서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를 되찾지 못하고 중국의 속국, 즉 조선이 황제나라라고 부르지 못하고 임금나라로 불리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런데도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슬슬 기는 사대부를 보면서 속이 터진 모양이에요.

"칼 튕기며 누대에 오르니 기운이 솟구친다/ 초라한 벼슬자리 내 모습 쓸쓸하여라/ 차디찬 가을 바다엔 교룡 (蛟龍)이 꿈틀대고/ 구름 깊은 장백산엔 호랑이 득실대네/ 세상에 태어나 만주땅을 못 삼키고/ 어느 때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인가/ 잔 비우고 말 타고 돌아서니 / 아스라한 저 하늘엔 안개 걷히네"

또 전남 나주 땅에서 이헌태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39살의 나이에 임종할 때도 아들에게 유언하면서 "천하에 황제라 일컫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황제를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 . 참, 죽을 때 저런 것도 한이 되었나 보지요. 바람둥이가 어찌 죽을 때는 애국심을 가지셨네.뭐야.

임제가 죽고 300년이 지난 뒤 황현은 이 마을 지나가다가 " 영웅이시어 저승에서나마 한을 푸소서, 오늘은 나라가 독립하여 황제의 자리가 높습니다". 이 매천 황현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를 잃자 바로 자결했죠.

만주땅을 보고 울분을 토한 사람이 또 있죠. 함경도 땅에 가서 육진을 개척하였던 세종때 무인이었던 절재 김종서. "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능연각상(능연각에 걸리는 공신의 초상화)에 뉘 얼굴을 그릴꼬" 우리 조상들이 만주 땅의 회복에 관심이 많았구만, 지금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 안하는데. 중국이 자꾸 성질 건드리면. 아휴, 참자, 참아. 성질 좋은 사람이 참아야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