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삐 내리막길로 한참 하산하다 보니 오전 7시 50분에 밤티재에 도착했다. 휘청 굽은 고개위에 아스팔트 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아침 먹고 갑시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영래 대장께서 "양반이 길거리에서 밥을 먹느냐"며 또 '양반론'을 거론하신다. 왜 안나오나 싶었죠. 대신 백신종 선배가 가지고 오신 귤도 먹고 거창 오꼬시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속리산 정상을 향해 부푼 기대를 안고 발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고도를 높여 갈수록 눈이 더욱 쌓여 있었다. 발목이 푹푹 빠졌다. 뽀드득 뽀드득, 푹신 푹신. 동심에 빠지는 듯했다. 이 같은 시간 황량한 시멘트 거대도시 서울에서 불쌍하고 가엽게 사시는 분들이 생각난다. 또 유치하게 '비교를 통한 행복 도취'에 젖어 있구만.
다시 눈,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객관식 눈은 무엇인가. 1) 하느님의 머리 비듬 2) 하느님이 드시는 설탕이나 소금이나 밀가루 3) 하느님의 순수 마음체의 분말 4) 비나 수증기가 영하에서 언 결정체. 정답은 4번. 딩동댕.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기분이나 정서에 휩쌓여 3번을 정답으로 찍으면 안됩니다.
아름다운 눈 벌판, 착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눈, 이 눈을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더라구요. 가난해서 그런지 1) 저 눈이 다 소금이나 설탕이었으면 했죠. '돈'으로 보이더라구요. 2) 겨울의 기백과 기상, 푸른 소나무 마저 흰 옷으로 강제로 입혀 버리는 저 '폭군', 절대순백의 이미지 3) 눈이 내리면 길이 완전 감추어져 길을 새로 누가 내야하지 않겠나 하는 '개척의 길'이 떠올랐죠. 4) 도시적인 사고인데, 눈이 왕창 내리면 길거리가 또 더러워지겠구나. 즉 '오물'로 생각했죠. 눈도 이렇게 다양하게 느껴질 수 있죠.
신선. 하얗게 센 긴 머리카락과 기다랗게 늘어뜨린 하얀 긴 수염을 한 채 하얀 두루마기를 옷을 걸치고 있죠. 즉 흰색은 신선색이죠. 눈도 흰색인 것으로 보아서 신령스럽고 서기가 서려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얀 설산 (雪山)을 나아가면서 발견한 새로운 사실. 온천지가 아닌 산천지가 눈으로 뒤덮이면서 산에는 생물이라고는 나무만 독야청청 (獨也靑靑)하더라구요. 동물은 커녕 미물도 흔적도 없고, 풀과 꽃들도 자취를 감춰버렸다. 개구리는 지옥 같은 음산한 땅속에서 지내고 있겠지. 오히려 더 편한가. 곧 보자. 냇가 잠자는 개구리는 영양도 풍부해서 몸보신용으로 마구잡이로 잡히는 가봐요. 자다가 날벼락이지 뭐. 인간들에게 육보시한다고 생각해라.
엄동설한(嚴冬雪寒), 북풍한설(北風寒雪)의 겨울에는 식물이 장군 (將軍)이구나. '설중군자' (雪中君子)는 나무구나.
갖가지 다양한 나무들의 가지에는 하늘에서 눈이 살짝 살짝 내려 아름다운 눈꽃이 만발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나무가 스스로 제 힘에 의해 화려한 천자만홍의 나무꽃을 피우지만 날이 추워서 식물꽃이 지면 대자연도 못내 섭섭해서 나무에게 하늘의 눈꽃을 피우게 하는 거구나. 이헌태, 니 말이 맞다. 멋진 말이다. 봄,여름, 가을은 나무 스스로 꽃을 피우고 겨울은 하늘이 꽃을 피우게 한다.
송강 정철의 시 한수. "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 가지 꺽어내어 님 계신 데 보내고저/ 님께서 보신 후에야 녹아지다 어떠리"
'白雪巖山'. 눈을 보니 눈이 즐겁다. 앞의 눈은 짧고 뒤의 눈을 길게 발음하는 거 아시죠. 하여튼 각설하고. 이헌태가 모처럼 씩씩하고 경쾌하게 잘 나아가간다. 눈을 보는 눈이 즐거우니 기계처럼 작동하는 다리가 하나도 고달프지도 힘겹지도 않았다. 머리가 좋으면 몸이 덜 고달프다고 하더니.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 아세요. 최근 등장한 '몸 철학'은 다음에 설 풀고. 설 풀게 워낙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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