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산 정상부근에는 무릎 깊이까지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등산객의 통행이 많은 일반 등산로라서 망정이지, 다시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문명인' 이헌태가 깊은 산, 흰 눈 속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 헤매는 '야생짐승' 같구나. 뭐하는 짓인지. 흰 눈이 내포한 순수성을 만끽하면서 인격 높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고생하는구나. 의미부여 세게 하는구만.
모두들 침묵을 지키면서 바삐 서둘렀다. 눈 안개가 자욱해지면서 속리산은 사라졌다. 아쉽지만 할 수 없다. 상고대와 설산 구경을 실컷 했으면 충분하지. 내내 속리산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나아간다는 것은 무리한 욕심이겠지.
문장대에서 1.6킬로미터를 총총 걸어가니 신선대를 지나고 오후 1시 10분쯤 임경업 장군이 7년간 수도 끝에 득도했다는 입석대 (1003미터)를 지났다. 이정표는 속리산 정상인 청황봉까지는 1.9킬로미터.
임경업장군은 참 희한한 분이에요. 충주 달천 출신으로 어릴 때는 백 여척의 층암절벽을 세발자국으로 뛰어내리고 올랐다고 하네요. 하지만 제가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고, 어쨌든 나중에 큰 전투에서 대승을 일으킨 분도 아니고 이조 병자호란 전후에 친명반청파 장수로 의리를 지켜 영웅대접을 쬐금 받은 분이었더라구요.
그런데, 그런데. 서해 서산 바닷가마을에서는 해마다 풍어제를 지내면서 무당의 접신이 바로 임경업장군이라고 하네요. 서해안 일대에서는 임경업장군을 조기잡이 신으로 섬긴다고 해요. 뜬금없이, 웬 서해. 서에 번쩍 , 동에 번쩍. 홍길동 장군이구만. 사연은 있었더라구요.
임경업장군이 청나라에 찍혀 배타고 명나라로 피신할 때 연평도 부근에서 배에 식수도 떨어지고 식량도 떨어지자 선원들이 크게 동요를 했는가 봐요. 이때 임경업장군이 바닷물을 마시게 했는데 식수가 되었고 인근 섬에서 가시나무를 베어다가 바다에 꽂으니 가시마다 조기가 걸려있었다고 해요. 그것이 유래라고 하네요. 조기 좋아하시는 분은 임경업장군을 기억해주세요. 하여튼 임경업장군이 달천과 가까운 속리산에서 도를 닦았구만.
휘날리는 눈발 속을 그냥 또 걸었다. 안개가 개었다 흐렸다하면서 언뜻 언뜻 보이는 속리산은 능선과 봉우리들이 겹겹이 빼곡하게 밀집된 '산(山)과밀지구' 같았다. 멋진 봉우리. 멋진 바위들이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속세와 천상을 연결하는 큰 바위 관문을 지나서 계속 정신없이 내달리니 오후 2시 5분, 드디어 천황봉(1057미터)이 나왔다. 눈발이 휘날리고 희뿌연 눈안개 때문에 시야는 겨우 5미터. 천지개벽의 순간처럼 요동을 치면서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거센 한풍(寒風)이 불고 있었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상 바로 밑에 내려와 바람을 피하며 마지막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천황봉 정상에는 한맥금북정맥의 분기점인 탓에 완등을 기념하는 어느 산악팀의 기념 축하로 왁자지껄했다. 우리 대간팀도 곧 저런 환회와 영광의 날이 오겠지. 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후 2시 20분쯤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은 늘 마음이 가볍다. 몇 시간만 가면 만수계곡 마을에 도착하겠지. 룰룰루.
거의 수직에 가깝게 급경사길을 한참 내려왔다. 눈으로 덮여있어 미끄러지기가 일쑤였다. 천황봉으로 이어진 산을 내려오니 웬 등산객을 만났는데 앞으로 큰 산만 하나 넘고 2시간만 쭉 가면 만수계곡 마을로 내려오는 피앗재골에 당도할 것이라면서 안심시킨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헌태의 통곡어린 호소. "국민 여러분, 산에서는 절대로 거짓말 하지 맙시다". 이 말 때문에 얼마나 우리가 고통을 받았는데. 그럼 반대로 갈 길이 아주 멀었다고 했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 상황에서는 그게 더 나았다고 확신합니다. 이헌태 남 탓하는데 선수야. 저의 철학 아십니까. "잘 된 것은 내 때문. 잘 못된 것은 남 때문". 잘 났다, '내 탓이요' 운동을 다시 한번 가슴속 깊이 새겨라.
시간이 지나갈수록 바람은 속리산 큰 계곡을 타고 올라온 탓인지 '윙윙' 위협 소리를 내며 더욱 거세어지면서 산을 날려버릴 것 같은 기세로 눈보라까지 세차게 보태졌다. 마치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는 것 같았다. 누군가 "매화는 冷艶한 향기를 뿜기 위하여 한결 차갑고 매서운 寒波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는데, 조만간 필 눈 속의 매화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무심하게 계속 걸었다. 매화 향기의 향긋한 상상도 한계가 오는 법. 사람 잡는구만. 이헌태, 죽는다.
북풍한설, 만주벌판. 독립군도 아니고 이 무슨 사서 고생인가. 눈만 빼꼼히 내고 얼굴을 온통 가렸는데도 우측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릴 수가 없었다. 눈보라와 강풍이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진짜 바늘이 콕콕 찌르는 것 같고 쌀알이 총알처럼 얼굴을 마구 때리는 것더라구요. 고개를 숙이고 뚜벅 뚜벅, 아무리 가고 또 가고 해도 나와야 할 피앗재는 나타나지 않고 봉우리를 하나 오르면 또 봉우리가 나타나고 사람 미치겠더라구요. 둔덕같은 봉우리를 수십 개도 훨씬 더 넘은 것 같다. 이헌태의 넋두리, "이건 산행(山行) 이 아니라 고행(苦行)이야"
모두들 지쳐 있는 상태에서, 곧 도착할 것이란 기대는 넘쳐난데다, 또 곧 해가 떨어질 것이란 두려움이 앞서면서, 누구 하나 투정하나, 꾀부릴 여유하나 부릴 수가 없었다. 귀신에 홀리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가고 또 갔다. 뒤에 낙오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블행중 다행은 눈 길에도 스패치 덕분에 신발이 젖지 않았고 장갑은 축축하고 차가웠지만 손의 온기를 뺏지는 않았다. 겨울철 산행에는 '완전무장' 아시죠. 그 혜택을 좀 보았죠.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시작한 이래 이렇게 힘든 산행은 처음이었다. 막판에는 박현수 선배가 코피까지 흘렸다. 너무 고되서 그런가. 나 원참, 산행 20년에 코피 흘리시는 분은 처음 보았네. 어젯 밤 뭐했나요.
나온 김에. 우리 아들 자랑 좀 합시다. 동물도 지 새끼 귀여운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인데.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지만. 구더기는 인간이 가장 더럽게 여기는 똥통이 낙원이라면서요. 구더기는 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똥이 필요하다면서요. 다 맞는 짝이 있다는 거지요. 사례를 들어도 꼭 더러운 것 들더라. 수준 따라 사례가 나오는 거지 뭐. 뭐야.
시쳇말로 편견을 없애야 합니다. 잣대를 자기 잣대가 아니라 남의 잣대에서. 역지사지 (易之思之)의 심정. 그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구더기는 똥이 필요하다니까요. 이헌태, 고집세네. 지난 대간 종주기에서는 딸 자랑했는데. '이헌태를 한국최고의 팔불출로 임명합니다'
이 따식이 이번 산행 초반에도 바위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할 때, 항상 내 바로 앞에서 기다리면서 아부지가 올라 오거나 내려 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 즉시 손을 내밀었다고 보고를 상세히 드렸잖아요. 이번 산행에서는 이상하게 제가 눈 길에 자주 미끄러졌죠. 아들이 내 앞에 나아가면서 약간만 미끄러운 길이 있어도 조심하라라고 얼마나 주의를 주는지. 아들보기 민망해서. 쪽 팔려서. 니가 아부지해라.
감동의 물결, 감동의 물결이 아니라 감동의 해일. 산행 마지막에 다다라서, 눈보라속에서 몇 시간씩을 사투를 벌일 때 나를 인도하면서 "해진다. 빨리 가자"며 저를 독촉하더라구요. 저도 체면이 있지, 이를 악물고 한걸음 또 한걸음 발걸음 쉬지않고 내딛었죠. 아부지와 아들의 역할이 완죤 꺼구로 되어 얘비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했죠. 기온도 급강하한데다 얼굴에 세차게 때리는 눈보라가 어찌나 매서웠든지. 아들의 장갑이 축축하고 빳빳하게 얼어 버렸길래 내가 낀 그래도 마른 장갑을 바꾸어 주었더니 나중 아부지가 찬 장갑을 끼고 손이 시려워 자꾸 손을 부르르 떠는 게 안스러웠든지 "아부지 장갑 바꿉시다"라고 말해 아부지를 또 감격시켰죠. 아비된 도리로서 바꿀 수 없잖습니까. 기특한 마음만 접수했습니다. 속으로 "잘 키웠구나". 이헌태의 아들이니 그럴 수 밖에. '맹장 아래 졸병 없다고'. 이헌태, 부럽다 부러워. 그건 그래. 이제 나는 노후생활은 완죤 보장되었네. 이 놈이 나를 배신하겠나. 이헌태, 꿈깨라. 알겠습니다. 보험이 뭐 필요 있나 아들 하나 잘 키웠는데. 뭐야. 틀림없는 사실, 이원교 독한 놈.
아들 때문에 종마의 산행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 아들만 없었으면 종마는 이날 낙오했을 거라고 다들 놀린다. 왜 들 그러십니까. 아들은 다음에도 시간이 나면 꼭 따라나서겠다고 느스레를 떨고 있네요. 중요한 포인트. 니를 이렇게 키운 아버지는 누구지. 스스로 컸다고. 잘 났다. 잘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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