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방송(EBS)의 유명 강사였던 서울 화곡고 이석록 교사. 얼마 전 고교 졸업식과 함께 사표를 내고 학원가로 옮겨 화제가 된 이다.
그는 "빌어가며 수업을 해도 절반 이상이 잠자기 일쑤고, 조금만 야단쳐도 대드는 아이들을 보며 지쳤다"고 '이적'의 변을 남겼다.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고3 교실의 현실은 그의 말 그대로다.
새벽밥을 먹고 0교시부터 시작해 야간자율학습까지 해내야 하는 학생들에게 수업은 어쩌면 가장 좋은 수면보충 시간이다.
학원에, 과외에, 참고서에, 문제집에 밀려 학교 수업이 그만큼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지난 17일 교육부의 사교육비 경감 대책이 발표된 후 만난 고교 교사들에게 가장 큰 화제는 '교육방송 활용'이었다.
그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참담하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공교육이고 무엇이 사교육인지, 교육부는 과연 공교육을 살리자는 건지 죽이자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교육방송은 사교육 아닌가요. 비용 적게 든다고 우리나라 모든 고교생들을 TV 앞에 앉게 한다는 건 학교 수업을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자는 거지 뭐겠습니까".
교육부 발표에 이어지는 EBS의 '야심찬' 계획들을 보면 더 질린다고 했다.
EBS는 이미 여러 가지 운영 방안을 내놓았다.
강사진부터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유명 강사들과 현직 교사들을 반반 정도씩 포진한다고 한다.
언어 이석록, 수학 박순동, 사회탐구 최강, 과학탐구 이범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강사들과 섭외중이다.
현직 교사는 시.도 교육청의 추천을 받아 학생, 학부모까지 참여해 선발한다.
"교육방송에서 실력 있는 강사들이 강의하면 학교 선생님들도 뒤지지 않기 위해 수업 준비를 더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교사를 더 우습게 볼텐데 수업이 제대로 되겠습니까"라고들 했다.
"EBS에서 질문에 답하는 사이버 교사단까지 운영한다고 하니 학교 교사는 교육방송 뒤치다꺼리나 하게 됐죠".
운영 방식도 교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EBS측은 고교생의 방과 후 보충학습 일정과 라이프사이클에 맞춰 순환편성한다고 한다.
학교를 마친 후, 학원 수강을 한 후 언제든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자는 걸 깨워도 어젯밤에 교육방송 보느라 못 잤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했다.
교재 문제도 꺼냈다.
EBS 강의 교재, 평가원과 교육방송이 공동제작한 교재 등을 쓰게 되면 교과서보다 더 중요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교육방송 요약 강의나 해설 강의 같은 신종 사교육이 등장할 거라고 하는데 학교 수업도 비슷하게 가야 학생들에게 먹혀들지 않겠나 싶어요".
TV를 두고 흔히 '바보상자'라고 부른다.
시청자들의 감정이나 사유가 제작진이 의도한대로 끌려간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교육방송의 수능강의도 학생들을 '바보'로 만드는 극약 처방이라는 지적이 많다.
고교 교육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논리력과 추리력, 상상력, 창의력을 길러주는 방향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TV 강사가 제시하는 꼭같은 방법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쪽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은 거의 대부분이 의도와는 반대로 갈수록 사교육을 팽창시키는 결과로 변질돼 나타났다.
공교육을 더 깊이 추락시키면서까지, 학생들을 바보상자로 끌어들여가면서까지 사교육을 때려잡겠다는 교육부의 이번 '도박'은 그래서 더욱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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