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나 백자처럼 세련됨이나 우아함은 없지만 투박스런 빛깔과 불룩한 몸통, 소박한 그 자태에서 마치 어머니의 품같은 포근함을 느낀다.
가만히 귀를 갖다대면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옛 어른들이 '옹기'(甕器)를 두고 한 말이다.
옹기는 예부터 서민들과 동고동락했던 가장 전통적인 생활용기. 농촌지역의 집안 부엌 옆 양지바른 곳엔 어김없이 장독대가 자리잡고 있고, 그곳에 모인 옹기들은 제각각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를 담는 역할을 한다.
우리 음식문화를 지켜온 소중한 존재들. 30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장독대가 없는 집은 없었다.
김치와 간장, 된장 등 우리민족이 즐겨먹는 식품이 대부분 발효식품이라 자연적 옹기가 필요했고, 곡식과 식수를 저장하는 용기로도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새마을운동과 급격한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주거문화 개선과 가공식품 범람 등 식생활의 급격한 변화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옹기'는 서서히 생활의 뒤편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각 고을마다 번성했던 옹기촌들도 하나둘씩 소리없이 사라지기 시작해 이젠 거의 자취를 감췄다.
'흙의 숨결이 살아있는' 옹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다.
한평생 어머니의 사랑스런 손길을 받아오던 옹기는 이젠 돌아가신 노모처럼 점차 잊혀져가는 문화유산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 민족 고유의 항아리들이 본격적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번쩍거리며 보기좋은 광명단 옹기가 들어오며 전통옹기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이후 플라스틱 용기가 출현하면서 서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받았다.
최첨단 김치냉장고까지 출현하면서 완전 퇴물이 됐다.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는 '옹기골'이 있다.
이곳에는 30여년 전만 해도 옹기가마가 즐비해 우리의 전통옹기를 생산해내던 곳이다.
이외에도 칠곡에는 석적면 반계리 '점마'마을과 지천면 달서리 동원골, 왜관읍의 회동 등도 일반 옹기를 구워내던 옹기촌이다.
그러나 요즘엔 옹기촌의 가마들이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 지천면 옹기골에서 김차봉(62)씨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김씨도 4년 전부터 옹기가마 주변을 찜질방으로 만들어 운영하는데다 후계자도 없어 옹기제작의 마지막 기능인인 셈이다.
수십년간 번성했던 '옹기골'의 이름도 이젠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만큼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사라질 운명이다.
"옹기일이 너무 힘들어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어. 가끔씩 도자기 만드는 대학생들이 옹기굽는 일을 해보겠다고 찾아오지만 너무 힘들어서 금방 도망쳐 버리지". 경남 합천이 고향인 김씨는 16세 때부터 옹기장이를 시작했다.
당시엔 농사일 외에는 특별히 취업할 곳도 없는데다 옹기가 번성하던 시절이라 옹기기술자들이 돈벌이도 좋았다.
울산과 경산 등을 전전하다가 30년전 칠곡군 지천면 옹기골에 정착한 뒤 줄곧 옹기장이 일을 해왔다.
김씨는 "지금은 조금 쉬고 있지만 곧 정비하여 조금씩이나마 옹기굽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평생 만들어온 전통 대형 옹기제작보다는 화분 등 소규모 항아리 쪽으로 바꾸고 있다.
김칫독이나 간장독은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화분 등 작은 항아리는 아파트 베란다 등 인테리어 소품용으로 인기가 있기 때문.
옹기는 구워만드는 방법에 따라 질독, 푸레독, 오지그릇, 반옹기, 옹기 등으로 구분한다.
전통옹기는 우리나라 산야 곳곳에서 채취할 수 있는 찰흙이 주소재다.
그리고 부엽토의 일종인 약토에 식물성 재를 물과 함께 개어서 잿물을 만든다.
이것을 적당한 수분(20%)이 함유된 상태에서 그릇의 안과 밖에 옷을 입힌 뒤 1천200℃ 정도의 고온에서 10일동안 구워낸다.
옹기의 모양은 물레의 속도와 손놀림에 따라 결정된다.
만드는 과정도 대부분 도자기보다 쉬울것으로 생각하지만 옹기 기능인들은 "옹기기술자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어도, 도자기만 빚던 사람은 옹기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1960년대 말부터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그릇의 등장으로 질그릇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정부에서는 옹기보호책을 시작했다.
1989년 5월 옹기 인간문화재를 지정했고, 이듬해엔 옹기장(옹기만드는 기술자)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했다.
한국전통옹기보존연구소 정명호 박사는 국민보건건강 차원에서 무공해 생활옹기 개발과 함께 전통옹기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전통옹기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에 노력하고 있다.
옹기는 식품을 썩이지 않고 숙성시키는 힘을 가진 살아숨쉬는 그릇이다.
스테인리스나 플라스틱 그릇들이 판을 치고, 값비싼 수입품이 넘쳐나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않고 음식을 신선한 채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옹기는 그 과학성이 세계적으로 입증돼 우리의 소중한 유물로 재평가돼야 한다.
칠곡.이홍섭기자 hs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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