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키위나무 아래

교회 안. 노란색 촛불들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순백의 드레스와 회색양복의 신랑신부가 목사님 앞에 나란히 서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목사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순 순백의 드레스가 흔들렸습니다.

"주옥이!" 영환씨의 짤막한 외침소리가들립니다.

훗날 그녀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벌써 5년이 지났어. 그런데도 어디선가 그이가 불쑥 나타나서 주옥이! 하고 내 이름을 불러줄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아이한테는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고 했어. 아빠의 오랜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아직 초등학생이니까, 좀 더 자라면 얘기 해 줄테야".

선이 가는 얼굴에 수려한 이마, 쪽 고른 코, 웃을 때면 약간 떨리는 듯한 단아한 입술. 그들은 대학 도서관에서 만났습니다.

장학금을 계속 받기 위해 공부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그런 학생들이었습니다.

7년의 열애 끝에 그와 결혼한 것입니다.

명문대 철학과 출신의 신문기자인 영환씨는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영환씨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취재하러 갔다 오던 중에 고속도로에서 그만…".

그녀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영환씨를 빼앗아 간 봄(春)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쁜 선생님! 우리 국어선생님! 무수한 세월이 그녀를 관통하고 흘렀습니다.

영환씨를 쏙 빼닮은 그녀의 아들은 올해 부모님이 다녔던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장래희망은 신문기자. 우리들은 그녀를 고전적인 여성이라고 은근히 험담을 하면서도 그녀의 지순한 사랑에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보송보송한 털이 돋은 가느다란 줄기들이 그물처럼 얽혀서 서로를 꼭 껴안고 있습니다.

키위나무는 연인들의 화신이라도 되는 듯이, 연두색 이파리와 은빛 방울 같은 꽃봉오리를 달고….

천현섭 〈무산유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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