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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됐다.

1377년에는 직지심체요절이 역시 금속활자로 인쇄됐다.

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보다 약 200년 앞선 것이다.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우리의 활자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통일신라는 다라니경을, 고려왕조는 두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간행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인쇄술이 민간인의 생활향상에 기여한 정도는 약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귀족들이 인쇄술을 방을 꾸미는 장서 제작에 이용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귀족들은 책을 만들 때 아름다운 글씨체, 값비싼 표지에 집착했을 뿐 누구에게 읽힐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지식과 정보를 확산하는 데 기여해야 할 인쇄술이 인테리어 기술로 전락해버린 느낌이다.

비단 금속활자 인쇄술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목판 인쇄의 시대가 열린 지 이미 오래지만 애서가들은 서적의 필체를 중시, 목판 글씨는 그 자체로 일종의 예술작품 취급을 받아 온 게 현실이다.

몽고 침입으로 부인사 대장경이 소실된 후 18년에 걸쳐 제작한 '제2 고려대장경'은 우리민족 최대의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안으로는 농민과 천민의 봉기, 밖으로는 몽고의 침입에 직면한 최씨 무신정권이 민심을 돌리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걸작품을 남기기는 했지만 지식과 정보공유를 통한 삶의 질 향상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

어려운 문자는 첨단 인쇄술의 사회적 기여도를 줄인 또 하나의 원인이다.

한문은 표의문자로 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에 비해 훨씬 복잡하다.

민간인들은 어렵고 복잡한 글자를 배우기 힘들었다.

이에 따라 문자로 기록된 모든 정보와 지식은 귀족 등 특수계층의 전유물이 돼 버렸다.

이 결과 서민 생활향상이나 서민문학의 발달도 제한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평생 사람살이에 사연이 없을 리 없다.

더구나 가난에 찌든 민간인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삶의 행불행을 맛본 민간인들의 사연은 대부분 한때의 푸념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서양의 인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200년 늦었지만 독일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은 종교개혁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는 당시 교황청이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타락상을 보이자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이 반박문이 전국으로 퍼지고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 인쇄술이 있었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식과 정보는 어떤 권력보다 강력한 힘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정보와 지식을 귀족에게서 평민에게로 이양하는 데 기여했다.

지식과 정보를 통해 각성한 많은 시민들이 귀족에 대항했고 종교개혁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첨단 기술이 장식장을 채우는 소품으로 전락하거나 특수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사진 : 팔만대장경 경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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